화진포 해수욕장
흰 포말이 온 백사장을 뒤덮는다.
바다의 거센 몸부림은
육지의 모든 사랑을 시기하는 울부짖음인가.

흰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바다로 가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이면서, 숨을 쉰다.”

최인훈의 『광장』 첫 문장이다. 명준이 동중국을 지나며 생각한 부분의 서술이다. 정말 그럴까. 가을 빛 바다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필자가 동해를 찾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정말 크레파스보다 진한 바다 빛 풍경이 있을까 해서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았다. 태백준령을 넘는 동안 바다가 크레파스 빛보다 진한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먼 곳의 일렁거림만이 하늘과 바다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가을 바다로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발길을 거진항으로 향했다. 버스가 등대가 있는 방파제까지 갔지만 중간에 내려 항구가 있는 소읍의 거리를 걷기로 했다.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친다. 불어오는 바람에 소금기는 없었다. 그간에 개인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고요함 그 자체였다.

삼발이 모양으로 쌓아진 방파제는 거센 바다의 몸부림을 거뜬히 받아 냈다. 방파제와 인근 바위섬으로 바다는 제 몸을 던졌고, 흰 포말들이 하늘 아래로 흩뿌려졌다. 푸른 하늘 아래로 햇볕에 반사된 포말들이 눈부셨다. 방파제 밑으로 흐르는 바다의 울음은 무서울 정도로 우렁찼다. 바람이 많은 그날은 바다가 계속 온몸을 뒤척였다. 먼 바다로 도마뱀 혓바닥같은 물비늘이 일었다. 바다는 정말 크레파스보다 진했다.

이 정도면 여행의 목적은 성공한 셈이다. 크레파스보다 진하다는 그 말을 확인했으니. 순간 또 다른 이미지가 다가온다. “가을동화”와 “파이란”의 배경. 사실 필자의 머리 속에는 “가을동화”보다는 “파이란”의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던 터였다. 방파제에 앉아 있자니 이강재(최민식)이 방파제에서 파이란(장백지)의 유골 상자를 들고 펑펑 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의 울음이 그렇게도 서글프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국가대표 호구’인, 삼류 건달 강재에게도 사랑은 있었던 것일까?

파이란에게만은 ‘괜찮은 남자’였던 강재. 그 강재가 걸었던 길을, 파이란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서 걸어야만 했던 그리고 파이란이 걸었던 길을 상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대진항. 대진항은 거진항에서 버스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그저 최북단 항으로 생각하면 될 터이다. 그만큼 자그마하다. 파이란이 생각난다. 파이란이 끝내 팔려왔던 곳. 세탁을 외치면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곳이다. 대진항의 쓸쓸함은 강재와 파이란의 안타까운 인연 때문에 더욱 쓸쓸해 보인다.

버스를 탈 것도 없이 천천히 걷자면 화진포 입구가 보인다. 화진포 혹은 화진포 해수욕장 입구에는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라는 큰 푯말이 보인다. 화진포는 호수의 이름이고, 화진포 해수욕장은 말 그대로 곱디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해수욕장이다. 파도가 높으면 화진포로 바닷물이 들어갈 것 같았다. 역으로 화진포의 물이 바다로 흐를 수도 있다. 그만큼 호수와 바다가 가깝게 붙어있다.

철새가 찾아드는 화진포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호수 위로 뉘엿뉘엿 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온다. 열기를 잃은 햇빛이 호수에 어리고, 그 빛은 어린 철새들의 자맥질로 일그러진다. 호수 근처로 펼쳐진 해송들의 모습이 건강해 보인다.

바다로 나가자 거센 바람이 육지로 불어오고, 바다의 몸부림은 더욱 거세졌다. 육지를 집어삼킬 듯한 파도가 계속 몰려오고 뒤척이는 바다는 엄청난 포말을 만들어낸다. 포말들이 온 사방을 뒤덮고, 해수욕장은 희뿌연 안개에 쌓인 듯하다. 그 속에 은서와 준서의 모습이 어린다. 파이란 또한 이곳에서 강재에게 보내는 마지막 사진을 찍었을까? 모두들 이루지 못한 사랑. 바다는 육지의 모든 사랑을 앗아가는 상징이런가.

해의 자취가 멸하자 붉은 보름달이 해면 위로 떠올랐다. 바다는 계속 몸부림을 쳤고, 달은 의연히 제 자리를 따라 상승하고 있었다. 조각배 하나는 위태한 몸짓으로 달빛 아래 출어를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동안 바다로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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