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상 가운데 하나는 불교였지만 현재 불교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극히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올해로 불기 2546년이 되었다는 것을 셈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조차 불교의 기본 교리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구복신앙으로서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석가탄신일(5월 19일)을 맞이하여 불교 교리에 내포된 인식론과 존재론을 근거로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불교 인식론의 기초 : 십이처설

불교는 신과 우주와 관련된 문제인 초월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기보다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관찰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에 불교는 그 나름의 독특한 인식론적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십이처설이다. 십이처는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인식 기관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라는 인식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주체적 인간의 특질로서 의지를, 객체적 대상의 특질로서 법을 들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지란 인간의 자율의지를 가리키며, 법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적 인과율을 가리킨다.

십이처설이 기원전 원시불교에서부터 갖추어진 교리 체계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인간의 자율의지와 객관적 세계의 보편적 인과율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혁신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 철학과 비교해본다면 이것은 근대 서양 철학에 와서야 체계화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이 십이처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으로 보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인 법(인과율)에 위배되는 초월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인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불교의 인식론적 체계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불교는 초월자, 절대자를 신봉하는 종교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불교 존재론의 기초 : 일체무아

불교에서는 일체(세계)의 속성에 대해 ‘색은 무상하고(일체무상),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일체고),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일체무아)’라는 삼법인을 내세우고 있다. 인간은 생, 로, 병, 사의 과정을 거치며,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교에서의 주장이다.

하여 불교에서 인간의 자아는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자율의지)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실체로서의 자아는 찾기 어렵다고 본다(일체무아).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불교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때 진정한 깨달음은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고 본다. 이를 불교에서 해탈, 혹은 열반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열반을 추구하는 행위를 ‘소승’이라 비판하고,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면서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고 나온 계파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에게 깨달음을 제도하고자 힘쓴 석가모니의 뜻을 받들어 개인에게 한하는 열반보다는 대중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성불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

불교에 대해 우리가 갖는 오해 중 하나가 불교는 귀신을 쫓는 부적이나 써주고, 허무한 교리를 추종하는 종교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불교는 절대적 초월자를 거부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인과율을 기초로 그 나름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갖춘 종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불교가 과거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을 포용하는 데에서 구복신앙적인 측면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나타난 현상이며, 또한 반야경을 뒷받치고 있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 확대 해석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오해를 넘어 그 나름의 심오한 불교 교리를 탐색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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