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_파일/ 피터 키비(장호연, 이종희 공역), 「순수 음악의 미학 : 순수 음악적 경험에 관한 성찰」, 이론과 실천, 2000.

E. M. 포스터의 소설 『하워즈 엔드』에는 다음과 같은 클래식 음악 청취자의 유형이 등장한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숭고한’ 테마를 들으며 손이나 발로 박자를 맞추며 반응하는 문트 부인, 영웅이나 난파선을 상상하는 헬렌, 이와 반대로 음악 ‘자체’에 몰두하려 하지만 음악적 지식은 없는 마거릿, 악보를 펼쳐놓고 대위법 같은 전문 지식을 동원하는 티비까지. 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클래식 음악 청취자의 이야기는 바로 피터 키비(Peter Kivy)의 『순수 음악의 미학』의 서두다. 이 책에서 그가 대상으로 삼는 음악은 이 책의 원제인 ‘뮤직 얼론(Music Alone)’, 즉 서양의 클래식 음악 중 순수 기악음악이다.

가곡이나 오페라 등 텍스트가 있는 성악 음악이나 음악 외적 내용을 재현하는 표제 음악은 이 책에서는 논외이다. 키비는 음악 외부의 대상을 상상하는 헬렌이나 음악적 지식이 없어 보이는 문트 부인과 같은 보통 사람의 청취 유형부터 마거릿 같은 진지한 청취 유형, 티비 같은 전문적 감상자의 유형에 이르는, 이 책의 부제처럼 ‘순수 음악적 경험’들의 상세 분석을 통해 음악의 즐거움 및 이해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그저 음악이 연주될 때 ‘생각 없이’ 발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는 문트 부인도 간단하고 초보적일지라도 자신의 방식대로,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의 테마를 ‘지각하며 알고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들은 음악을 기술(記述)하는 수준이 덜 전문적이고 덜 세련되었을지언정 그녀에게도 음악적 ‘인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평균적인 청취자의 반응이 경멸되어야 한다거나 ‘지적인’ 감상‘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정해진 하나의 감상법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음악 이론적 어법에 정통하지 못한 보통 사람의 청취 역시 그 나름의 수준으로 순수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해진다(5-7장).

이 목소리에는 음악적 인지주의자답게 “음악이 정서를 환기시키는 대상이 아니라 ‘인지적인 경험’의 대상”임이 강력하게 전제되어 있다. 그의 모델은 순수 음악을 일종의 자극으로 보는 ‘자극 모델’과도(음악의 순수성은 보존하지만 인식의 측면은 희생시키므로), 순수 음악을 일종의 재현으로 생각하는 ‘재현 모델’과도(인식을 보존하는 대신 음악의 순수성은 희생시키므로) 선을 긋는다(4장). 이런 방식에 의해 순수 음악의 감상은 단순한 감각의 차원이 아닌 지적 인식의 차원으로 격상된다.

이밖에 키비의 유명한 음악적 표현론, 즉 ‘음악이 슬픔을 표현한다’, ‘음악이 슬프다’는 것은, 음악이 슬픔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청자가 음악 속에서 슬픔을 표현적 속성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음악의 정서표현과 인간의 정서표현이 유사하다는 증거물을 제시한다), 나아가 ‘음악이 어떻게 감동을 주는가’(8장)의 문제나, ‘음악적 심오함’(10장) 같은 흥미로운 주제도 논의된다.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 철학과 교수인 피터 키비는, 동시대 영미권의 미학과 예술 철학, 특히 음악 철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저명한 학자인데, 이 책은 음악미학의 제 논점(재현, 표현, 오페라, 그리고 이 저서 이후에 발표된 정격 연주까지) 성찰 시리즈 중 네 번째 저서이다.

사실 영미권 분석철학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독자에게는 분명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학적이고 난해하기만한 난공불락의 저서도 아니다.

제 나름의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 음반을 사고 연주회장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나아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입문서나 전문서적을 펼쳐보는 이들 모두, 특히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감상 태도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음악 감상과 이해 자체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하는 클래식 청취자가 한번쯤 접근해볼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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