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작품 순회전에 가다

전시회 풍경

<완당과 완당바람-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들>이란 제목의 추사 작품 전시회가 지난 4월 19일부터 5월 17일까지 영남대 박물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회는 유홍준의 <완당평전>(학고재, 2002)의 출간에 맞춰 학고재와 몇 년 전부터 추사 작품 전시회를 기획해왔던 동산방이 의기투합하여 국립제주박물관, 부국문화재단, 영남대 박물관의 후원을 얻어 이루어졌다.

이번 추사 작품 전시회는 서울 동산방 화랑과 학고재 화랑에서 지난 3월 22일부터 4월 11일까지 이미 가진 바 있고, 영남대 박물관을 거쳐, 제주국립박물관(5.27-6.30)과 광주 의재미술관(7.8-7.31)에서도 순회전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추사 작품 전시회의 의의는 남다르다. 이제껏 추사 작품 전시회는 1932년 10월 미스코시 갤러리에서 열린 <완당 김정희 선생 유묵·유품전>, 1956년 11월 진단학회가 주최하여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한 <완당 김정희 선생 서거 1백 주년 기념전>, 1986년 완당 탄신 2백주년을 기념하여 간송미술관과 고미술 동호회가 주최한 기념전에 이어 4번째이다.

이번 전시회는 전시된 작품이 모두 130여 편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로 치러졌다. 이번 전시회의 의의에 대해 전시회 관계자인 남진아 학예연구원(영남대 박물관 고고미술부)은 “그동안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거의 없는 개인 소장의 추사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루 관람 인원은 1,700-1,800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지방에서 갖는 전시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높은 수치이다.

이번 추사 작품 전시회의 특징은 추사 작품 이외에 중국 청조와 조선에서의 추사 동시대 인물의 여러 작품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추사의 예술적 가치와 의의를 가늠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완당바람’의 형성 배경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말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과 함께 세도정치의 문벌을 형성한 경주김씨의 후예이다.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가 되어 중국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동행하여 중국 연경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인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소개로 연경 학계의 명사인 주학년, 옹수곤, 오숭량, 섭지선 등을 만나 이후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오랜 교류를 갖는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김정희는 일찍이 금석학(비석 등에 새겨진 옛 글과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과 고증학(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경서를 설명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학문)에 심취하여 ‘입고출신’(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의 학풍에 경도된다.

이러한 그의 학풍은 과거 성리학적 학풍과는 매우 다른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성격의 것으로 조선의 동시대 학자들뿐만 아니라 중국 청조 학자들에게서도 큰 명성과 호응을 얻었다.

자연 그를 중심으로 주변에 그를 추종하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일파를 이루고 세가 확대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흔히 ‘완당바람’이라 지칭한다. 그 세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양반 출신의 문인(신헌, 남병길, 강위, 유장환, 이하응 등), 역관(이상적, 오경석, 김석준 등), 서화가(조희룡, 전기, 허련, 유재소 등) 등이 그것이다.

추사체의 형성과정과 추사체의 본질
완당의 일생은 다섯 단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유홍준, <완당평전>, 학고재, 2002, p.527 참고). 이는 1)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2)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 간의 학예 연찬기, 3)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 간 중년의 활동기, 4)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 간의 유배기, 5)제주도 귀양에서 풀여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 간의 만년기 등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그것이다.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된 4)의 시기를 정점으로 그 이전의 시기를 ‘입고출신’을 실현하는 데에 필요한 고전을 익히던 때로 이해한다면, 그 이후 즉, 제주도 유배 시기부터 추사체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에 의하면, 추사체란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는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p.579)이며, “특히 글자의 구성에서 대담한 디자인적 변형을 시도”하여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나”(p.566)는 것이다.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p.582)다. 또한 추사체가 지향하는 바는 “인위적 기교를 넘어 손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고고한 예술”(p.587)인 것이다.

이처럼 추사체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기존 서예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개성을 창출하려 한 근대적 예술 정신의 산물로 이해된다. 이를 유홍준은 “정통 서예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글씨는 대단히 파격적이며 아방가르드적이다”(p.459)라고 평가한다.

추사 김정희의 역사적 의의

추사 김정희는 변화하는 사상적 흐름에 따라 금석학과 고증학에 심취하여 ‘입고출신’의 자세로 서예를 한 차원 높인 인물이다. 그의 서예는 매너리즘으로부터의 탈피와 개성 창출이라는 근대 예술 정신을 성공적으로 발현시켜 추사체라는 매우 독특한 예술의 장을 펼쳐보였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명성을 얻어 중국의 여느 대가들과 어깨를 같이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예술을 감식하는 데에도 널리 명성을 얻어 중국의 섭지선과 함께 예술작품을 감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예술 세계 구현만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후배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예술 정신을 구현한 많은 후학들이 연이어 나타나 그의 예술세계를 계승하였다. 그는 과거 조선조 서예를 대표하는 대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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