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_파일/ 호이징하,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까치, 1998)

월드컵 개막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이런 때에 누군가가 월드컵은, 아니 모든 스포츠는 비속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스포츠가 점점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어 가장 순수한 놀이적 특질의 어떤 부분은 불가피하게 상실된다.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공식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아주 명백하게 이것을 보게 된다. ……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또한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마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고대 문화에서의 경쟁은 항상 신성한 축제의 일부를 이루었고 또 건강 및 행복을 가져오는 활동으로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 제의적 유대가 이제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스포츠는 모든 면에서 비속한 것, 성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으며 사회구조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모두 상실해 버렸다”(pp.294-295)는 이유로 호이징하는 그의 저서 좬호모 루덴스좭에서 현대 스포츠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 스포츠는 결코 문화 창조 활동에 봉사하지 못한다. 신성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옛날의 놀이 요소가 거의 완전하게 쇠퇴해 버”(p.295)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이징하가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 놀이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놀이는 다른 어떤 것에 혹은 문화적 현상에 종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놀이는 문명의 주된 기초”(p.15)이며 “놀이는 사회 구조 그 자체”(p.14)이다.

그러므로 원시 사회에서 행해졌던 신성한 의례와 봉헌 등에 포함되어 있던 놀이적 요소가 오늘날에도 이어져 사회와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 활동, 즉 법, 예술, 시, 학문, 정치 등에도 내재해 있다고 한다(사실 좬호모 루덴스좭의 내용 대부분이 이를 예증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 놀이는 자유를 표상한다.

놀이를 행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거나 누군가에 의한 강요가 있어서 놀이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강요와 의무로 구성된 일상적 삶으로부터 놀이는 멀리 떨어져 일상적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놀이는 축제, 성스러운 의식과 닮아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 개념과 사회 복지라는 시민의 이상이 생겨나면서, 또한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기술적 진보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제반 사회, 문화에는 놀이적 요소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문화는 ‘놀아지는’ 것이 정지되었다”(p.288). 대신 인간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 인간은 문화의 진보는 산업 사회로의 발전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이를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라 칭한다)으로서의 고유한 본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놀이가 “간접적이며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가 놀이 자체의 기쁨에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p.317)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놀이를 통해 우리는 바로 그 기쁨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와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 활동, 즉 법, 예술, 시, 학문, 정치 등에 놀이적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사회 활동, 문화 활동의 주된 목표를 바로 그 놀이적 측면, 다시 말하면 즐거움 그 자체에 둘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학문이, 우리의 대학이 점점 명예와 돈의 추구라는 실제적인 목적 추구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한다면, 이를 바로 세우는 방법은 호이징하가 보여주고 있는 선견처럼 우리의 학문과 우리의 대학 내에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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