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탄생 150주년 - 가우디의 삶과 건축세계

안토니 가우디(1852-1926)는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건축가로, 탄생 150주년을 맞아 스페인이 올해를 ‘국제 가우디의 해’로 지정하고 그에 대한 조명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최근 가우디의 전기를 펴낸 하이스 반 헨스베르헌은 그동안의 가우디에 관한 연구가 주로 건축 양식에 관한 것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지적하고, 가우디의 작품에 관한 진정한 이해는 가우디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함을 역설했다. 이는 가우디의 작품이 기존의 건축 양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과, 그가 일평생 오직 건축 하나만을 붙잡고 있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건축가로서의 시작과 그의 주요 사상

가우디는 모두 수공업 가계였던 부계 가우디가와 모계 코르네트가의 전통을 물려받아 어릴 적부터 건축가로서 일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받았다. 고향 레우스 인근의 유적지 가운데에는 포블레트 시토 수도원 유적지가 있는데, 그곳은 카탈루냐 지방 중 국토회복전쟁 동안 가톨릭의 흥망성쇠를 반영하는 독보적인 곳이다. 소년 가우디는 수차례 그곳을 탐험하여 포블레트 복원을 계획하는 동안, 그의 사상의 한 핵인 카탈루냐 중심주의를 함양하고 건축가로서의 꿈을 다져갔다.

건축 실습생으로 있던 1878년 카탈루냐 문예부흥 운동인 ‘레나센샤’가 전개되었는데 가우디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은 종교와 카탈루냐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카탈루냐어의 완전한 재정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였다. 또한 가우디는 레나센샤 정신의 순수한 물리적 표출인 ‘카탈루냐 과학유랍회’에도 가입했다.

정식 건축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우디는 우연찮게 성가족 대성당 건축의 총책임을 맡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해서 1883년 11월 3일, 가우디는 성가족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성가족 대성당 건설은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추진된 것이 분명하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급속하게 산업화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정체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자 유례 없던 급변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대부분 도시에서 사회적 결속력을 다질 만한 이렇다할 대체물도 없이 사회의 전통 구조가 무너졌다.

이에 전통주의자들은 ‘이상적인 가족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며 대응했고, 많은 악의 세력에게 위협을 받던 가톨릭은 ‘이상적인 성가족’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가족 대성당 건축에 임한 가우디는 급속히 종교적 보수주의에 기울게 된다.

주요 작품들

카사 비센스(1879-88)는 신무데하르 양식으로 된 가우디의 진정한 처녀작이라 할 작품이다. 그때까지 가우디가 한 작품 중 가장 이국적인 작품으로, 벽돌, 돌, 잡석, 타일과 같이 다양한 재료를 겹쳐 사용하여 질감의 효과를 높인 방법은 모더니즘 양식의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오늘날까지도 좁은 카롤리나스 거리의 협소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카사 비센스는 현실 도피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러나 가우디에게 이 건물은 가톨릭 신앙이나 카탈루냐 설화에 바탕을 두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건축물이 된다.

1883년부터 가우디는 돈 에우세비 구엘의 후원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된다. 1890년대 초 완공된 구엘 궁전은 비록 당시에는 여러 다른 고대 문화를 합쳐 놓은 어정쩡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가우디는 여기서 최초로 신화와 우의와 유추를 엮어 한 편의 문학을 완성하였다. 지하실은 지옥이고, 위층과 연결되는 중앙 홀은 견고한 땅을 상징하며, 옥상은 천국이다. 즉 구엘 궁전이 전체적으로 주는 메시지는 구원과 부활의 언어이다.

한편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90)는 ‘근검’과 ‘최소주의’가 설계의 핵심이다. 흰 석고의 포물선 아치 천장이 길게 펼쳐진 1층 복도가 가장 장관으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천천히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구엘 성지(구엘이 의뢰한 노동자 거주 단지)는 그가 생각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서, 노동자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할 때에 진정한 이윤이 창출되는 종교적 부권 사회였다. 이전에 만든 건물에서는 장식이나 구조물 디자인에만 사용되었던 수곡선이 이번에는 건물 전체를 포괄하는 원리가 되었다.

또한 구엘 공원은 전원 도시로서, 산업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안식처였다. 이는 거주자가 카탈루냐 정체성과 가톨릭 신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면서도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조화, 종교와 지역주의의 합일, 형태와 기능의 조화, 선사 시대와 현대의 결합, 전통 기술과 최신 기술의 혼용이 이루어지게 했다.

카사 바트요(1904-6)는 건물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닮았는데, 특히 신장 모양 창문에서 뼈 모양의 기둥이 눈에 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뼈로 된 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명한 카사 밀라(1906-10)는 기원이 없는 건축물로 불릴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뽐내고 있다. 이 건축물엔 특별히 새로운 건축 유형을 적용했는데, 이름하여 ‘자유로운 구조 설계’였다. 외장을 보면 가우디가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때가지 도시 계획 지구의 주택은 대칭, 직선, 직각이 특징이었는데, 카사 밀라의 평면도에는 직사각형이 없고 하나의 거품 덩어리 같이 매우 유기적인 디자인이다.

비판 그리고 불멸성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아르 누보와 모더니즘 양식은 점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 가우디의 작품 역시 이에 속했다. 가우디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관능미는 이제 건축가들 사이에서 저속한 키치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과도한 신앙심에 푹 절은 그의 괴팍한 성격은 당대 문화계의 냉소와 조롱을 샀다. 그러나 1969년 이후부터는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어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그의 생태학적 예술관은 오늘날에 더욱 그 가치가 인정된다. 그는 예술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창조가 아니라 발견이다. 새 작품을 만드는 데에 기반이 될 자연 법칙을 찾아내어 창조주와 협력하는 것이다.”

기실 그는 하늘, 구름, 물, 바위, 심지어 인간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놀랄만한 건축적 영감을 이끌어내곤 했다. 결국 가우디 건축의 핵심엔 카탈루냐, 가톨릭 신앙, 그리고 자연이 놓여져 있다고 하겠다.(조셉 플라, “가우디는 숲에서 나온 원시 그리스도인이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