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치의 핵심은 정당정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면 왠지 뒤가 좀 개운치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원칙과 실제의 괴리를 목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붕당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의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런가.

당쟁이 시작된 것은 하나이던 사림이 이조정랑(吏曹正郞) 임명문제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자체 분열하게 된 1575년(선조 8년)의 일이다. 이에 동서 합당을 위해 힘쓰던 이이(李珥)가 결국 서인으로 자정(自定)하게 되자 붕당정치는 비로소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학문이 발전되고 정계가 분화되면서 동인 가운데 이황 계통은 남인, 조식 계통은 북인으로 갈라졌으며, 서인도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붕당 정치는 정치 세력이 붕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상대방의 비판을 인정하고 공론의 대결을 통하여 정치가 운영되면서 17세기 중엽까지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현종 대에 와서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쳐 붕당정치는 그야말로 피 터지는 당쟁의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숙종 조에는 잦은 ‘환국(換局)’(대표적으로는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이 있음)을 통해 일당(一黨) 전제의 추세가 나타났으며, 그 와중에서 음모와 살육의 정치가 행해졌다.

이처럼 피가 피를 부르는 붕당의 폐단을 타파하고자 노력한 왕이 바로 영조와 정조다. 영 정조는 탕평책(탕평 : 왕도는 공평무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 그리고 탕평파가 함께 국정에 참여하는 일종의 거국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는 당시 노·소론 간의 소모성 정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에 정조가 1800년에 돌연 사망하게 되자 어린 순조를 꼭두각시로 세운 파행적인 세도정치가 막바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앞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조선의 붕당정치는 과연 발전의 과정 속에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조선시대의 사례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역사는 그것의 퇴행적인 면모까지 들추어내고 있다.

성호 이익(李瀷)은 자신의 붕당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모든 당쟁은 그 명목이야 어쨌든 결국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투쟁의 일환이었음을 이익은 꼬집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생존투쟁인가. 이에 대해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석필, 1997)를 쓴 이덕일은 “모든 길은 벼슬로 통한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즉, 당시 조선사회에서의 정치란 “권력은 물론 명예와 돈도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길의 종착점인 로마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그러한 과거사에 있지 않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라 했다. 현재 우리의 정당정치는 어떠한가. 걸핏하면 지역 감정을 부추기고 사상 공세를 펼치는 모습이 과거의 무엇과 닮아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정당정치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제도 속의 인간 즉 그들의 마음가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 정치인들의 과제가 정치의 순수성을 되찾는 데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공도(公道)를 실현하고자 하는 군자들의 모임”을 군자당(君子黨)이라 했을 때, 바로 그 ‘공도의 실현’이 정치의 순수성에 해당하리라. 각 정치인들이 정당 속에서 오직 ‘공도의 실현’을 위해 움직일 때 비로소 발전된 정당정치는 민주정치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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