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제정 후 1년, 진상규명작업 진단

한국 현대사 최대비극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제주 4.3’은 53주년이 된 현재까지도 그 진상이 밝혀지고 있지 않다. 미국의 4.3 연구가 존 메릴 박사는 논문 「제주도반란」에서 “전후(戰後)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제민일보의 한 기자는 “4.3의 도화선은 1947년 제주읍내에서 경찰이 3·1절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한 ‘3·1발포사건’이었다”고 이야기했다. 14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격분시켰고, 사건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남로당 지부조직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됐다.

결국 48년 4월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 싸움과 관련이 없었던 무고한 양민들마저도 토벌대에 의해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2년간 지속된 ‘토벌’ 과정에서, 적게는 1만 5천여 명, 많게는 3만여 명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연구가는 당시 경찰과 미군정이 4.3을 공산이데올로기적 폭동으로 기술한 것은 “과잉진압으로 빚어진 엄청난 인명피해를 덮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제주 4.3 연구소’의 관계자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4.3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던 반공이데올로기와 역대군부독재정권의 4.3 왜곡, 이와 관련한 정부와 미국의 자료의 미공개 등에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난 해 1월 12일 공포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은 4.3의 진상규명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특별법은 왜곡된 4.3의 역사를 바로 잡고, 희생자 심의 확정,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 등을 상정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정부 내에 특별법에 의거한 조사기구를 두어서 진상조사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상규명작업이 그리 순조로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제주4.3 진상규명을 위한 기구의 구성은 특별법이 공표된지 만 1년 후인 지난 1월 17일이 되어서야 완성됐다. 행정자치부가 마련한 ‘4.3진상규명명예회복위원회’와 ‘4.3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위원구성에 대해 4.3관련 시민단체들과 정부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특별법에서 보장한 위령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예산이 필요하지만, 책정된 예산은 고작 30억 원에 불과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특별법의 경우 그 예산이 몇 백억 원이 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다”라고 지적했다.

제주 4.3연구소에서는, 더욱 중대한 문제로 희생자 복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았던 희생자들이 법원에서 재심을 받도록 하는 조항이 특별법에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법적인 차원에서의 복권조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렵게 성취된 특별법 제정이 그 의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정치학자는, 정부수립과 동시에 발생했던 ‘제주 4.3항쟁은 그것의 사후적 수용과 해석의 진전 여부와 함께, 갈등과 화해, 배제와 포용, 분단현실과 통일지향의 상반되는 두 측면을 내장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척도이며, 또한 우리 사회의 이성적 역사 이해의 수준을 반영하는 척도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런 맥락에서 제주4.3항쟁의 진실 규명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작업이다.

한편, 지난 달 20일 ‘제주 4.3행방불명인유족회’와 ‘제주도 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 4.3사건 희생자유족회’의 한 단체로 통합, 정식 출범했다. 이선찬 회장은 “지금을 시작으로 4.3진상규명과 희생자명예회복에 힘을 쏟아 나가자”고 말했다. 이로써 2만 8천 여명으로 추산되는 4.3유족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작업이 활기를 띌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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