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위기’는 정말로 오고 있는가

언론인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송건호 선생의 회고담을 보면, 자신이 젊은 기자로 일하고 있던 1950년대에는 신간 서적을 사기 위해 서점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서점을 드나들기는 했으되 신간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고서점에서 구한 책들은 아마 대부분이 일본책 아니면 영어로 된 책이었으리라. 한글로 된, 읽을 만한 신간 서적들이 그 시대에는 그토록 드물었던 것이다.

송건호 선생의 회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1950년대의 경우와는 아주 달랐지만, 내가 대학을 다닌 1970년대의 경우에도, 읽을 만한 신간 서적이 풍부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니, 상당한 수준의 풍요를 자랑하는 분야가 딱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은 바로 문학 분야였다. 비록 서양쪽에 편중되었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점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로 하고서 보면 꽤 다양한 목록을 구비한 것으로 평가될 만했던 여러 『세계문학전집』들, 부족한 대로 최소한 <기본>은 갖추어져 있었던 『한국문학전집』들, 그리고 제법 활발하게 출간되어 나오기 시작하던 신작 소설집과 시집들이 가난한 우리 세대 젊은이들의 서가를 그나마 영 썰렁한 것은 되지 않도록 구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 분야 하나를 제외하고 보면, 지적인 열망을 가진 젊은이들의 갈증을 채워 주기에는, 1970년대의 서점가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황량한 모습을 노정하고 있었다.

1970년대의 서점가에서 다른 분야는 온통 서글픈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던 데 반해 어찌하여 문학 분야만은 홀로 빛날 수 있었던가?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여기서 다룰 주제는 아닌 듯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든, 이처럼 문학 분야 하나를 제외하면 서점가가 그저 쓸쓸하기만 했던 시대의 풍경화를 청년시절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요즈음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매월, 매주, 아니 매일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보라. 어떤 분야의 경우이거나를 막론하고, 얼마나 풍성하며, 얼마나 다양한가. 지금 내가 20대의 젊은이라면 모든 다른 일을 젖혀 버리고 하루를 48시간으로 만들어서라도 온전하게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을 만큼 매혹적인 책의 잔치가 날이면 날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겪어 온 사람으로서의 ‘실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책의 위기>라든가 <활자문화의 쇠퇴>라든가 하는 진단에 별로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위기>니 <쇠퇴>니 하는 것이 언젠가 실제로 도래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나의 실감을 가지고 판단하기에, 그런 날이 적어도 나의 생전에 올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앞으로 몇 백 년 이내에 올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영상매체니 멀티미디어니 하는 것들이 기세를 올린다 하더라도, 책의 매력과 중요성이 그렇게 간단히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에는 카세트 테이프가 책을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을 때 아이작 아시모프가 했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이상적인 카세트라면, 독립된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간편하고,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며, 개인적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뜻에 완전히 따르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이 중 <사람의 뜻에 완전히 따른다>는 말의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이 눈을 떼면 이내 테이프가 멈춘다.

그것은 사람이 다시 눈을 돌릴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사람의 눈길이 닿으면 이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빨리 또는 천천히, 앞으로 또는 뒤로 움직일 수 있다. 건너뛸 수도 있고 되풀이할 수도 있다.> 이런 <마법의 카세트>는 바로 <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수천 년 전에 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였다. 음미해 볼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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