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누구인가

지식인은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기에 사람들은 지난 여름, 그의 모습을 찾아 헤매었는가. 지식인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에 실린 이문열씨의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칼럼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에서도 이씨의 칼럼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쯤에서 조선일보가 지적한 것이 ‘지식인 사회의 위기’였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어떤 상을 가지기에 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지식인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의 지식과 광범위한 교양을 갖춘 사람”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J.F. 리오타르는 “계몽주의자 및 19세기 그들의 후계자인 ‘지식인들’은 교육의 보급에 의해서 시민의 자유가 강화되고 지방 분권주의가 차단되며 전쟁이 억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도처에서 그 신용이 상실된 교육이 요구하는 것은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다 수행적인 직업 교육이다. 무지는 더 이상 부당함이 아니며, 지식의 획득은 보다 좋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적인 자격부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지식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식인의 무덤’에서 이야기한다.

현재의 지식인은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성인들은 침묵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매여 있는 일터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지식인들’을 괴롭히고 또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책임을 스스로 수행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지식인사회의 위기’에 대한 조선일보의 문제제기는 전체 지식인사회가 아닌 특정 부류 지식인들의 위기감의 반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학)는 “조선일보와 보수적 지식인을 논쟁의 타깃으로 삼는 진보 지식인 진영의 공격적이고 폭로적인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을 지식인사회 전체의 위기로 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논쟁의 진행에서 지식사회의 분열을 우려하는 일부 지식인 역시 자신의 입장을 확장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최근의 학술계간지들은 지식사회의 근본적 성찰을 담은 글들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여기서 리오타르의 말과 연관지어 주목할 만한 것이 전상인 교수(한림대 사회학)의 저술이다. 반년간지 『열린지성』 최근호(제9호)에서 전 교수(한림대 사회학)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지식인들이 자기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교수는 “지식인은 성인이나 도인이 결코 아니며,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지식인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지식인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인정하며 자신의 무지한 부분을 드러낼 때, 서로 돕는 진정한 지식공동체의 형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제정 러시아의 행동하는 지식인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와 드레퓌스 사건으로 두드러진 프랑스의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지식인 인텔렉추얼(intellectual), 이탈리아 지식인 그람시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보살펴주는 ‘유기적 지식인’, 리오타르의 지성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지식인 세계를 위협하는 독재적 힘과 그들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는 지식인. 이 모두는 상황과 기준의 차이를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고, 거대 담론을 표방하기보다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인식하며, 동시에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를 통과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 당시에 자신들이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오랜 시간 자괴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그들의 머리에 ‘실천적인 지식인’의 상이 맺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이를 알고 있는 지식인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민족시인 고은은 말한다. 지식인이란 일차적으로 고난을 전제하는 책임 있는 자유주의자인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통제하더라도 그들의 소재(所在)는 이상과 미래 지향의 뜻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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