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권 옥수수 박사를 만나

“나는 자연의 원리를 믿는 사람이다. GMO(유전자조작식품)는 병충해에 100% 저항성을 갖는 단인자품종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김순권 박사는 GMO에 대해 이렇게 답하며 “자연과학 연구는 친환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순권 박사가 아프리카를 처음 찾은 1979년, ‘악마의 풀’이라 불리는 스트라이가 때문에 아프리카 전역의 옥수수밭은 다 누렇게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이에 김 박사는 복합유전인자에 의한 방제법을 개발했다. 이것은 95% 옥수수와 5% 스트라이가를 같이 심어 약간의 피해를 입은 복합인자 품종을 골라 육성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에 의하면 옥수수들이 성장할수록 저항성이 강해져 수확할 시기에는 95% 이상이 살아 남는다고 말한다.

김순권 박사를 만나기 위해 경북대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작업복 차림에 시커먼 피부를 가진 한 농부를 볼 수 있었다. “오느라 힘들었겠다. 앉아서 쉬어라” 라는 그의 첫마디처럼 그에게는 푸근한 농심이 배어 있었다. 그가 과연 노벨상 후보에 다섯 번씩이나 오르고, 농업부문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벨기에 국왕의 국제농업연구대상을 수상한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슬쩍 허름한 옷차림에 대해 물어보니 “언제든지 밭에 나가기 위해서”라고 답하며 “지금쯤 옥수수는 내가 안 온다고 욕하고 난리 칠 것”이라며 옥수수 밭에 대한 그만의 깊은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순권 박사가 미국유학 당시 미국에서 제일 많이 재배하는 옥수수는 단교잡종 - 원종이 2개인 잡종 - 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복교잡종 - 원종이 4개인 잡종 - 을 제일 많이 재배하고 있었다. 김순권 박사는 “학급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 2명의 평균이 4명의 평균보다 크다”며 “원종이 2개인 단교잡종이 좋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단교잡종의 개발을 위해 그는 수원소재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으로 귀국해 1976년 아시아 최초의 단교잡종인 ‘수원19호’ 개발에 성공했다.

‘수원19호’는 지금도 우리나라 옥수수 농가에서 심고 있다. 한편으로 뿌듯한 마음도 들지만 그가 1979년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에 연구원으로 발탁되어 아프리카에 가 있었던 17년 동안 우리나라 옥수수 연구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북한 역시 옥수수 연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김순권 박사는 80%가량 진척된 슈퍼옥수수의 완전개발을 통해 북한이 과학적으로 식량해결을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임을 이야기했다.

김순권 박사의 삶의 철학은 “남을 위해 살자”이다. 그는 우리가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이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간다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이왕 태어난 거 적당히 살아가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일할 때 더 재미가 있고, 더 할 일이 많을 것”이라며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현재 김순권 박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국제옥수수재단(ICF)에서는 “북한 옥수수심기 범국민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순권 박사는 “시립대가 발전하려면 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통일을 위해 옥수수심기에 참여해야 한다”며 7천 시대인의 운동참여를 부탁했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