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중산정책 포기의 허상을 밝힌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수확기 벼 매입 계획’을 골자로 한 <쌀가격안정대책>을 내놓았다. 연이어 지난 4일에는 사실상 쌀 증산정책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2004년 WTO 쌀재협상에 대비한 쌀산업 중장기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발표에 대해 농민단체들은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 역할을 회피하고 농민에 그 책임을 떠넘기는 정책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 정부가 발표한 대책의 내용은 이렇다. 농림부와 농협, 민간유통업자는 총 3조 9586억원을 들여 지난해보다 13.8% 늘어난 1325만석의 쌀을 매입할 예정이며, 이 중 575만석(전체 예상 수확량의 15%)은 정부가 직접 매입하고 나머지는 농협과 민간유통업자를 통해 매입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특히 농협과 민간유통업자가 매입할 쌀 중 100만석에 대해서는 ‘수탁판매제’를 도입할 예정이다. 한편 쌀가격 안정을 위해 당초 250만석을 공매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대폭 줄여 100만석을 공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이면에는 쌀이 과잉생산되어 재고량이 많아 쌀값 하락이 예상된다는 점과 WTO 규정에 따라 농민에 대한 정부 보상제를 점차적으로 축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대책은 많은 문제가 있다. 정부가 매입할 예정인 575만석의 양은 작년 629만석에 비해 54만석이 줄어든 양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지난해보다 13.8%가 늘어난 쌀을 매입하겠다고 한 것은 오히려 농협이나 민간유통업자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더욱이 농협이나 민간유통업자의 상당수가 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계절진폭이 1.3%에 불과하여 이들의 수익성은 떨어질 것이 당연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특단의 부양책 없이 민간에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은 부당한 처사이다.

수탁판매제의 실효성 역시 의심스럽다. 수탁판매제란 쌀 가격에 대하여 선도금 70%를 미리 지급하고 나머지 30%는 실제로 쌀이 판매된 후 정산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쌀재고 관리가 허술하고 계절진폭이 낮은 상황에서는 쌀값 하락이 예상되기 때문에 수탁판매를 원하는 농가는 드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탁판매를 강제하는 것은 고스란히 농가의 손실만을 낳을 뿐이다.

또한 정부의 공매량을 250만석에서 100만석으로 줄이는 데에는 약 4천 170억원 정도의 재정 부담이 야기된다. 결국 이렇게 불필요한 재정 부담이 생겨난 것은 정부의 쌀 재고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현 쌀 재고량은 FAO(유엔식량농업기구)가 권장하는 적정재고량(1년 소비량의 17-18%인 550만석-600만석)에 약 400만석 초과한 989만석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결코 많은 양이 아니다. 과거 93년 쌀재고량이 1200여만석에 달했지만 이후 연속 흉작으로 96년에는 쌀재고량이 200여만석 이하로 떨어져 식량자급에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경험이 있다.

또한 통일을 준비하는 이때 북한의 논면적이 남한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쌀재고량은 과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발 양보하여 정부의 주장처럼 쌀의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량 증가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너무나 안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번 정부의 대책 발표에는 쌀 가격 폭락의 핵심인 쌀재고량에 대한 어떠한 방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의 발표는 2004년에 있는 WTO 쌀 재협상을 놓고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현재의 추곡수매제도는 WTO 체제에서는 민간에 이양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탁판매제와 같은 민간 주도형 쌀 매입제도를 미리 적용하여 WTO 체제에 대한 적응력을 고양시키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좀더 근본부터 체계적으로 기초를 다져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더 이상 눈가리고 아웅식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보는 농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농자천하지대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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