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역사극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한 두 해는 아니지만 최근 몇 년 간의 대하 역사극의 열풍은 남다르다고 하겠다. 특히 「왕건」을 필두로 한 최근의 대하 역사극은 주로 정권 창출을 둘러 싼 권력 투쟁과 음모 술수 등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의 역사극 중 특히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리메이크 되고, 그때마다 큰 호응을 얻었다. 이와 비슷한 역사적 인물은 아마도 한명회 같은 인물일 것이다.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가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일개 파락호였던 그가 한 국가의 전권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파락호란 중국 송대에 형성된 도시 건달을 칭하던 개념이다. 요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명성왕후」를 비롯하여 흥선 대원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들은 대체로 파락호에서 절대 군주에 가까운 힘을 가진 대원군이 되기까지의 성공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가 현재에도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파락호의 정치학이라 할 어떤 처세술 때문인 것 같다. 힘이 없을 때에는 천하 난봉꾼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여 적을 안심시키고 때가 왔을 때 인정사정 없이 적을 공략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기술, 그런 것을 파락호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의 대하 역사 드라마는 약간의 형식적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이런 파락호의 정치학을 효과적인 처세술이자 권력 창출 방법처럼 보여준다.

사람들이 이토록 파락호의 정치학에 관심이 깊은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정치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파락호의 특징은 절대 신의 따위는 중요치 않으며 권력 창출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파락호의 정치학이 ‘돋보이는 점’은 힘이 없을 때는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며 자신을 위장할 수 있는 가면술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교보문고 집계를 보면 지난 이십년간 한국의 베스트셀러 대부분은 처세에 관한 책이었다. 난세일수록 처세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처세술에 골몰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실상 처세술이란 가면술에 다른 이름이 아닌가. 타인에게 결코 진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얼굴을 바꾸며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파락호의 정치학이자 처세술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 사회는 이러한 파락호의 정치학을 사회 관계에서의 뛰어난 처세로 인정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신의나 신념 혹은 인간 관계의 도리같은 것보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박쥐 근성도 “발이 넓다”는 미명 하에 선호되고, 자신의 명확한 견해를 밝히기보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비위나 맞추는 것을 “인간성 좋다”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파락호의 정치학이 인간 관계라는 이름으로 판을 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명확한 신념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입각한 관계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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