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무어라 할까, 조선의 아름다움이랄까, 멸망해 가는 조선의 풍속, 그것이 가지는 구슬픈 아름다움을 나는 그려보고 싶었다.”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李之)의 소설 『이조잔영(李朝殘影)』에 나오는 화가 노구치의 말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려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문학 평론가 김윤식(서울대 교수)이 노구치의 말들에서 발견한 것은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의식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이었다. (『김윤식 문학기행』, 문학사상) 노구치에게 조선인은 ‘미적 대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며, 그의 관심이 미적인 영역에 머무는 만큼, 지적·도덕적 실존으로서의 조선인의 모습은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출간한 이래,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방식 및 스타일로 규정되는 ‘오리엔탈리즘’은 제 3세계나 과거 식민지 현실을 분석하는 유용한 틀이자, 서양·비서양 문화의 상관 관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된다.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은 정형화된 이분법적 재현 체계를 통해 서양과 동양을 구별하는 하나의 특정한 사고 방식이다. 동양은 후진성, 기괴성, 관능성, 감성, 불변성, 독재, 수동성, 비합리성 등으로 재현되었고, 서양은 과학, 합리성, 이성, 민주, 역동성, 진보 등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인들에게 서구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킨다. 즉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제국주의 지배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사이드는 동양인 스스로가 서구인의 시선과 잣대로 자신을 해석하고 인식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최근에 출간된 샤오메이 천(Xiaomei Chen)의 『옥시덴탈리즘』(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사이드는 동양 문화에 서양 문화가 수용되는 과정을 묘사할 때, 문화 수용자의 능동적인 주체성을 간과하였다. 사이드 ‘문화 제국주의’와 ‘문화적 식민지화’라는 도식화된 틀 속에서만 파악했을 뿐이다. 즉 문제는 일방성과 단순화이다.

이에 대해 샤오메이 천은 ‘한 국가의 특정 집단이 이용하는 서구의 이미지’를 뜻하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동양 또한 능동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서양을 ‘타자’로 설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 마오쩌둥 이후의 시기에 두 가지 형태의 옥시덴탈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 정부가 강한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해 서구를 적대적인 존재로 그린 ‘관변 옥시덴탈리즘’이며, 이는 자국 국민에 대한 내적 억압의 기능을 수행한다. 나머지 하나는 서양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전체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저항하는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이다.

이는 비판적 지식인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서양이라는 우월한 타자의 이미지는 정치적 해방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된다. 이러한 상황은 동일한 담론이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중요한 것은 담론을 누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담론이 놓인 위치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탈식민주의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하위계층(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하위계층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하위계층은 언제나 왜곡되고 이해가 개입된 형태로 식민지 지식인에 의해 대변될 뿐인가라는 포괄적인 질문을 제기하였고, 이는 서양 학계의 주류 담론에 대항하는 효율적인 담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샤오메이 천에 의하면, 동일한 질문이 중국의 경우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마오쩌둥의 “누구를 위해 우리는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하위계층의 목소리로 말하도록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은 하위계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관리들에 의해 처형되거나 유린된다. 오로지 표현될 수 있는 것은 혁명적 현실에 대한 찬양과 하위계층에 대한 영광스런 옹호였다.

이처럼 샤오메이 천은 중국이라는 특정한 공간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담론의 역동적 관계와 그 담론이 놓인 특정한 맥락을 강조한다.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분석틀은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들을 은폐시킬 뿐이며, 문화 현상의 동적인 측면과 구체적인 경험들을 화석화시킬 뿐인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샤오메이 천의 논의는 “담론이 추상화된 역사성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실재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복원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정진배 연세대 교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수용자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주장은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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