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의 만남’-러시아 철학의 현재(Russian Philosophy Today)

지난 10일 인문학관에서‘철학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러시아 철학의 현재(Russian Philosophy Today)’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강연회에는 러시아 모스코우 과학원의 일리아 카사비네(Ilia Kassavine) 교수가 초청되었다.

카사비네 교수의 말은 철학과 이성백 교수의 통역으로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카사비네 교수는 독일과 미국 등에서 강연했고, 8권의 저서와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현재 러시아에서 철학은 어떻게 연구되고 있는가”였다. 강연회의 서두에서 카사비네 교수는 “러시아 현재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의 러시아 철학의 조류를 요약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카사비네 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러시아 사상계의 변화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정신과학들이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점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독단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의 전반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였고, 정치적 토론과 철학적 토론이 활발히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금서들이 공개되었다 한다. 철학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변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류들을 받아들였고 교과과정도 새롭게 현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사유화가 허용되고 공산당이 해체되자 오히려 많은 수의 학자들은 그들의 전공을 버리고 정계나 경제계로 나아갔다. 과거 체제 아래서는 정신과학 내지 사회과학이 국가의 지원을 받았지만 민주적 전환 이후에는 이런 지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은 오늘날과 같은 정신적 해방을 준비해왔고, 이러한 변화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러시아가 겪고 있는 위기는 지적인 위기라기보다는 경제적 위기, 구조적 위기이다.

정치적 민주주의, 시장경제, 문화적 자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그런 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비합리주의, 민족주의, 실용주의이다.

그 동안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비과학적인 사유 형식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했으며 그러한 사유형식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종류의 인문과학적 노력을 무시해왔다. 이에 대한 일차적이고 자연스러운 반발이 비합리주의이다.

전통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고,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몰역사적으로 과학을 예찬하는 행태를 박차고 비합리적인 것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합리주의는 제물이 되었고 대신 비합리주의가 해방적 사고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서구 세계의 산물이며 러시아의 고유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주장에서 나타났다. 슬라브 중심적인 종교적 철학 이론들이 부활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러시아적 길’의 한 방략(方略)으로 수용됐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개인주의, 논리적 분석 사고 등까지도 ‘러시아적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대신에 농민공동체, 왕정, 종교적 공동체들이 예찬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의해 다양한 종교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며 다분히 파시스트적인 정치적 운동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경향들은 정신과학으로 하여금 사회적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도록 했다. “철학적 우파”라고 불릴 수 있는 이들은 추상적 사유방식을 버리고 철학적 언어가 단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이 사람들은 학자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정치적 과제들의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경향은 정신과학 일반에 지적수준 고양을 방해하였으며, 직접적인 정치적 이해(선거)에 봉사할 수 있는 사유 형태를 요구했다.

카사비네 교수는 ‘현재 러시아 철학계의 동향은 일원론에서 다원주의로, 논리에서 경험으로, 이성에서 실존으로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며 “러시아 철학은 오늘날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 위기는 동시에 새로운 전망들, 퐁요로운 시각들을 가능케 할 것이다”고 말을 맺었다.

강연이 끝난 뒤 계속된 질의응답 시간에서 “현재 러시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없나”란 질문에 카사비네 교수는 “당연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새로운 조류가 있다.

이들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막스 이론을 새롭게 받아들여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꾀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러시아 철학계의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는 “현재 러시아는 막연한 동양 철학이 아닌 인도, 중국, 한국, 일본 철학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국민들의 행복감에 대한 학생들의 궁금점에 “많은 러시아 대중들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행복은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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