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자본주의의 급격한 팽창이 결국 우려하던 대로 신자유주의의 수렁에 빠졌다. 홉스봄이 말한 것처럼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고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자본은 부자들만의 편이다. 빈부의 격차는 비단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 등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한 상대적 상실감으로 이어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억의 인구가 굶지만 지구 저편의 식량은 어두운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

인류의 삶에,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은 수없이 많다. ‘천부인권사상’이 유엔에서 인정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권리 특히 인권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자기 권익찾기가 커다란 관습과 기득권 방어에 밀려 무릎꿇기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저항은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역사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체 게바라나 마틴 루터 킹에겐 차별에 대한 인식이 있었으며 좌절이 있었고 저항이 이어졌다. 우리는 ‘체’는 폭력을, ‘킹’은 비폭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전기를 보면 폭력과 비폭력의 차이가 백지장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체 게바라 평전>은 바티스타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항거하는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의 전기가 약간은 영웅주의적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미국과 결탁한 정부에 반기와 함께 총을 든다. 바티스타의 폭정에 대해 나약한 민중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정권수호의 장막인 법테두리의 허상을 깨버린 것이다. “우리는 결단코 전쟁광이 아니다. 다만 그래야 하기 때문에 행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체는 변호한다.

마틴 루터 킹의 자서격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는 킹의 흑백을 지우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버스는 물론 기차, 심지어는 물건을 사기 위해 대기하는 자리까지 ‘흑백분리제도’가 적용되던 1950년대 미국 애틀란타의 이야기를 추보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몽고메리에서의 버스보이콧으로 시작한 비폭력저항운동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기득권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협상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킹의 집이 폭파된 후 성난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백인들은 물리적인 방법을 써야 알아들을 것입니다.” “내가 뺨을 맞게 된다면 나도 보복할 것입니다.” 비폭력운동이 위기에 처했다. 이 때 킹은 “우리의 운동을 증오의 운동으로 만들지 말 것”이라고 호소하며 “진정한 의미의 비폭력은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전략이 아니라 도덕적인 완벽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관”이라고 설득했다.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의 사회현실은 분명 다르다. 그러므로 어느 방법이 옳다고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곪으면 터진다는 것이다. 마그마는 얇은 지표면을 찾아 분출한다. 그러나 원인은 지표면이 아닌 마그마임을 알아야 한다.

지난 4·13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실정법을 어기면서까지 낙선낙천운동을 하게 만든 마그마는 무엇인가. 시애틀에 이어 워싱톤에서 국제 NGO들이 강력한 선진국독주반대투쟁을 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실정법 위반이나 폭력투쟁을 문제삼는 목소리가 오히려 구차하게 보이는 것은 현상이 아닌 본질을 직시한 대중들의 무게중심이 이미 그들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킹은 차별의 한가운데서 신음하는 흑인들에게 외쳤다. “우리의 싸움은 흑인과 백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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