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문화체험- 영화 ‘숨결’을 보고

1, 2편이 ‘나눔의 집’을 무대로 피해자 할머니들의 일상을 좇아 상처와 치유에 관한 목소리를 끌어낸 것이라면 ‘숨결’은 그들의 증언으로부터 거꾸로 시작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우리는 수많은 관계들을 맺으며 살아간다. 외부 존재들과 자신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도 수없이 많은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모두 파괴되고 다시 복구해야 한다면? 얼마 전에 본 영화 ‘숨결’은 내게 이런 ‘관계의 해체, 그리고 회복’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영화 ‘낮은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1편과 2편에 이은 3편 ‘숨결’로 7년간에 걸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끝낼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카메라의 피사체인 할머니를 끌어내어 그를 통해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카메라는 제 3자의 입장일 뿐이다. 카메라와 배우를 지켜보는 제 3자로서의 입장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보통 영화의 등식이 깨지는 순간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해체하는 첫 번째 관계다.

영화는 피해자 할머니 중의 한 분을 면담자로 내세워 할머니들이 말하는 자신의 현재와 과거의 관계를 들려준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의 만행과 한국 사회의 냉대라는 폭력에 의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해체당했다. 그 단적인 예로 심달연 할머니는 위안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백치가 되었고, 다른 할머니들도 수 십 년간의 세월을 자책감과 자기비하에 빠져 살아야 했다. 카메라는 담담하게 할머니들이 과거와 현재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을 그려내지만, 관객들에게는 그것이 잔잔하고도 아릿한 아픔이다.

내게는 그것이 ‘잃었던 여성성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여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회복과정인 셈이다. 김용수 할머니가 거울로 자신을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그런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는 김용수 할머니를 보며 코끝이 찡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회복의 연장선상에 마파니케의 로라들과 김윤심 할머니의 청각장애 딸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주둔한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던 마파니케의 말라이야 로라(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과 할머니가 위안소에서 얻은 매독으로 인해 청각장애로 태어난 김윤심 할머니의 딸.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할머니들이 자신과 외부와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특히 김윤심 할머니의 딸이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은 이러한 관계의 회복이 카메라가 흔들릴 정도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교감하며 시작한 영화는 강묘란 할머니의 장례를 그리며 이야기를 맺는다. 일생의 소원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떠나시는 할머니의 굳은 얼굴을 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바람소리가 들리는 엔딩 크레딧에서도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망자. 그분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무감에 가슴이 뻐근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숨결’은 할머니들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것을 과제로 남겼다. 할머니들과 역사의 관계는 지금 나와 역사의 관계와도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할머니의 여성성 또한 나의 여성적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사람의 삶도 이 할머니들의 삶이라는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안다면, 이 관계를 고민하고 다시 회복하는 것은 우리 전부의 몫이 되지 않을까. 할머니들은 ‘역사 속의 여성들’ 이니 말이다.
이미경(도시사회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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