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의 물결, 포스트 게놈 경쟁 시대에 진입한다

‘가타카(Gattaca)’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 DNA를 구성하는 네 가지 염기인 구아닌(G), 아데닌(A), 티민(T), 시토신(C)의 머리글자를 조합해 영화제목을 만든 것이 특이하다. 유전자의 우열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신세계를 그린 이 영화에서 인간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수정되고 배양되고 탄생한다. 2000년 현재, 영화 속의 일들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해 말 그 실체가 밝혀진 22번 염색체에 이어, 최근 21번 염색체의 염기서열 완전 해독으로 인간 유전자의 비밀은 한 번 더 껍질을 벗었다. 이는 유전과 관련한 생물공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인체의 모든 세포에는 핵이 있고, 그 속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있는데, 이것은 모친과 부친으로부터 각각 23개씩 물려받은 것이다. 염색체란 유전물질 DNA(디옥시리보핵산)를 담고 있는 그릇이고,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46개의 염색체 세트를 총칭하여 ‘게놈(Genome)’이라고 일컫는다. 현재 약 10만개로 알려져 있는 인간 유전자 가운데 6만 5천여 개에 담긴 정보가 드러난 상황이다.

인체게놈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기법과 기술들이 개발된 것은 1970년대였다. 당시에는 소규모 게놈분석만이 가능하였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 일부 기술들이 자동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대규모 게놈분석이 시작됐다. 인간게놈 연구사업이 여러 가지 게놈연구사업으로 확대되면서 유사이래 최대 규모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국제적 협동연구사업으로 발전했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 6개국의 공동작업단이 속한 인간게놈프로젝트(HGP)팀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게놈사업이란 인체 설계도를 구성하는 30억 쌍의 염기서열을 순서대로 찾아내는 작업을 말하며, 게놈프로젝트는 30억 쌍의 인체 염기서열을 분석해 이것을 지도로 만드는 일이다. 이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면 그 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생명의 설계도를 인간의 손에 넣는 셈이 된다. 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고 자라나 노화와 사망을 가져오는가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대학 이동희교수(생명과학/유전공학)는 “인간생명에 대한 태초의 말씀이 들어있는 책이 완성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아닌게 아니라 인간게놈에 대한 해독작업이 예정보다 5년 가량 앞당겨져 끝을 바라보게 된 지금, 게놈정보를 상용화하려는 ‘포스트 게놈(Post Genome)’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추세를 ‘제 4의 물결’이라고 했다. 생명공학 분야의 시장 규모가 정보산업의 그것보다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지금 세계는 ‘제 4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미 제약회사 암젠 등은 ‘EPO유전자’를 이용한 빈혈치료제를 만들어 지난해에만 13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민간분야의 게놈연구 선두주자인 미 생명공학회사 셀레라 제노믹스사는 머크 릴리 화이자 등 세계 10대 제약회사에만 각각 50만 달러를 받고 게놈 관련 정보를 판매해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 6월 초 게놈프로젝트 완료 발표를 앞두고 가장 고무되어 있는 곳이 바이오 산업현장이다. 코오롱, 삼성정밀화학, 한솔그룹 등의 열기가 뜨겁다.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어 개인의 염기서열에 대한 정보가 파악되면 개인 유전자 특성에 따른 맞춤 의약품이 등장하고, 한 개인의 생물학적 미래가 예측 가능하게 되며 무병장수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반대로 열등한 유전자의 경우 그것이 세상에 채 드러나기도 전에 미리 차단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심지어 괴생물체의 등장도 있을 수도 있다. 악명 높은 비극의 예에는 ‘나치의 우생학’을 들 수 있다. 나치의 우생학은 불임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신병 치료 시설에서의 안락사라는 만행으로 발전하였고, 급기야 인종이라는 색조를 띠면서 유태인 대학살로 극에 달했다. 이처럼 생명공학 기술은 생명현상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적용수준이나 대상에 따라서 인간의 삶과 주변환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유엔(UN)은 지난 97년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선언을 통해 ‘게놈은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며 인권에 반한 어떠한 연구도 금지한다’는 내용을 천명한 바 있다. 이는 ‘Post Genome Era’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윤리·도덕의 상실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이동희 교수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신비가 어느 정도 하락할지 모른다. 동물, 심지어 세균까지도 인간과 큰 차이가 없다는 논리의 비약이 있을 수 있다”며 “자칫 조물주의 존재가 쉽사리 부정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21세기는 유전학이 중심이 되는 시대다. 유전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체계적인 사전탐구가 시급하다. 게놈프로젝트는 유전학을 확대경 아래로 들이밀어 그 과거를 심판하고 장래를 평가하게 했다. 과학 연구 계획 이전에 제대로 된 생명윤리를 정립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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