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학생회관 지하 어두컴컴한 복도 어디쯤에서는, 아직도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를 옆에 낀 그녀가 때묻은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서 있을 것만 같다. 그녀의 이름은 ‘라라’다. 안동 하회에서,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에, 라라는 한동헌 <그루터기>를 부르고 김민기 <이 세상 어딘가에>를 부른다. 베트 미들러 <더 로우즈>까지 부른 그녀는, 천천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점차 거세지는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고, 그녀는 열에 뜬 음성으로 소리친다.

“전 이제 죽을 거예요. 죽어버리고 말 거예요” 단지 술에 취한 까닭일까?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정말로 한 장의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다. “.....나는 이 글을 마치고 바로 자살할 것이다. 아마 나는 신이 되려나 보다.”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우린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너무나 젊었고 세상은 너무나 황량했다.

박일문의 장편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나오는 라라의 이야기다.
라라가 가지고 다니던 알바레즈 「자살의 연구」의 프롤로그에는 미국의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통해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녀만큼 성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드물겠지만 그녀만큼 죽음을 끌어안고 시를 썼던 사람도 드물었다. 10년마다, 흡사 그 어떤 의식처럼 행해지던, 그녀의 자살 시도는 끝내 세 번째 시도에 이르러 그녀에게 죽음의 세계를 허락한다.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너무나 명민했고 세상은 너무나 황폐했다.

언제고 그런 것처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황량하고 황폐할 때라면, 삶의 우울함이란 탁하게 고여 있는 연못보다 어두울 것이다. 그 절대적인 우울함 속에서 죽음에 대한 매혹은 세상이 달려가는 속도만큼이나 무제한의 속도를 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으레 하는 말이 자살은 비난받아 마땅한 반사회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살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그 말이 너무나 자명하다는 점에 있다. 그토록 명백한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에 임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줄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그 자명함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상념에 극단적인 파국을 맞게 하고 자살을 신비화하는 것은 아닐까?

‘살아 남은 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자살에 대한 명백한 당위의 표명이나 통계적 수치의 작성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보다는 자살자들이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 관심이 기울여져야 한다. 알바레즈가 말한 것처럼, 자살은 “치명적으로 불발된 도와달라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그 절실한 외침에 귀기울일 때,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오히려 풍요로워 질 것이며 그제서야 세상은 살아갈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자살은 회피해야 할 불온한 행위라기보다 끊임없이 상기해야 하는 삶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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