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변성찬의 영화 속 가족

누구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태연하게(또는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자를 ‘백치’라고 한다면, 다수적인 척도를 내면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외부를 향해 비껴나가는 것을 ‘시뮬라크르’라고 한다면, 새로운 가족 영화에 등장하는 ‘엉뚱한 소녀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일 것이다. <좋지 아니하가(家)>의 막내 딸 용선 또한 그런 소녀 중 하나이다.

<말아톤>에서 ‘동물의 세계’를 통해 엄마와 자식 사이의 ‘분리의 윤리학’을 펼쳤던 정윤철 감독은, <좋지 아니한가(家)>에서는 ‘달과 지구의 관계’를 통해 가족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윤리학’을 전개한다. 영화는 ‘지구를 바라보는 달의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 ‘관계의 윤리학’은 가족 사이의 ‘소통의 필요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소통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윤리학은 적절한 ‘거리두기의 윤리학’이다. 달과 지구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둘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처럼, 가족 사이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적절한 ‘거리’라는 것이다. 이 ‘달’이 보내는 질문의 수신자이자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레이터가 바로 막내 딸 용선이다.

그녀는 ‘cancer’와 ‘cancel’의 ‘작은 차이(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모두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특히 ‘가족’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달’과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임시교사 경호이다. 이 ‘미스터리 커플’은 영화 전체에 이상한 기운을 퍼뜨린다.

이 가족은 ‘안 좋은’ 가족일까, 아니면 이만하면 괜찮은 가족일까? 이것이 영화의 제목인 <좋지 아니한가(家)>가 담고 있는 질문이다. 영화 내내 모래알처럼 따로 놀던 다섯 식구가 막판에 외부의 적을 만나 단결하지만, 상식적인 ‘화해’나 ‘관계회복’의 드라마가 이 영화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 ‘단결’의 계기는 ‘집에서 기르던 개(애견 용구. 그는 아들 용태와 딸 용선과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이다.

그 ‘단결’은 가족 아닌 것을 가족으로 연장시키는 새로운 모럴에서 시작된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가족 이해의 자기 확인’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포함적인 ‘가족의 확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단결과 연대, 그것은 또 한 번의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다. ‘남의 씨’인 용태가 창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은지는 새삼 확인할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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