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이별의 관성이라니 참으로 가혹한 언어이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생이거늘. 그러나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그 가혹한 언어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치열한 탐구이다. 나무에서 피아노로, 다시 피아노에서 나무로. 물질계를 넘나드는 김경주식(式)의 삶에 대한 탐구는 “이별의 관성”으로 귀결되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관성”에 대한 강조일 것이다.

그는 ‘피아노’라는 낡은 죽음의 이름에서 꽃을 피워낸다. 물론 “피아노에서 꽃이 핀다”고 믿는 그의 언어 구사에는 일면 성적(性的) 편력이나 풋기가 보이기도 하지만, 생에 대한 그의 탐구까지 가볍게 하지는 않는다.

김경주의 시에서 “인연을 매혹시킨 이별의 관성이다”라는 마지막 몇 구절을 곱씹고 있노라면 몇 해 전 고인이 된 한 여배우의 영정사진이 떠오른다. 세상의 마지막 순간, 그 마지막 한 장을 그리도 환한 미소로 장식하였던 이는 누구인가.

위의 시 구절을 떠올리며, 또 그 영정사진 한 장을 떠올리며, 문득 나는 “피아노가 된 나무가 오래전 꽃이 피었던 자리를 생각하는 밤”이라는 구절을 “죽음의 이름이 오래전 아름다운 생을 기억하는 밤”으로 통역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러한 욕망은 살아야겠다는 삶의 욕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더 절실한 마음으로 죽음의 그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별의 관성이라니, 아니다, 사랑의 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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