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세계에 하얀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죠. 하얀색에 대한 주관적 인상과 표현의 문제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부터 하얀색은 순수, 순결 등을 상징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주관적 인상과 표현의 문제를 가지고 하얀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좀 이상하군요.

위 시의 화자는 하얀 비너스상에서 ‘미모’, ‘여인’, ‘누드’로 이어지는 성적 욕망을 경험합니다(1연). 그런데 이후 시적 전환을 경험하며 오히려 성적 욕망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2연 5,6행). 특히 ‘통일’이란 시어에 주목해봅시다.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 중심을 갖는다는 것은 싸구려 허위적인 성적 욕망이 범접하기 어려운 매우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벌거벗겨진 비너스상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비너스의 하얀 몸이 순수와 순결을 막연히 상징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하얀 몸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고민했던 인상과 표현의 문제와 잘 어울릴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와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얀 피부를 가진 서양인을 동경하고, 그들과의 환락을 욕망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과연 우리가 꿈꾸는 색깔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의 하얀 피부에서 우리는 어떤 상징성을 읽고 있고,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실체로 감각되는지, 혹은 우리는 그들 앞에서 어떻게 벌거벗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함종호(국어국문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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