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오늘날 우리의 시에서 병리적 징후는 뚜렷하다. 예술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가 ‘고통’이라는 지적이 이미 있다. 그래서 이민하의 시에서 종종 발견되는 어떤 병리적 징후들, 예컨대 ‘거식증’ ‘소화불량’ 따위의 시어들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문제적인 것은, 병리적 진단을 통해 새로운 미학적 개념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시는 쌍둥이에 관한 것이다. 이민하는 ‘한 개의 입으로는 태어날 수 없’는, 그러나 또한 ‘서로 다른 얼굴로는 태어날 수 없’는 쌍둥이라는 생물학적 존재 양상을 빌어 삶의 태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문제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쌍둥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세상에 심장박동을 전할 수밖에 없는 이 비극적(?) ‘관계’, 그리하여 ‘지퍼처럼, 복화술처럼’ 입 맞추는 연습을, 혹은 ‘변장술’을 익힐 수밖에 없는 그들의 관계, 의학적 개념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민하의 감식안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녀의 시가 주는 진정한 매력은 두 개의 심장박동 중 하나를 지우는 시적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제 고통에 대해 노래했던 수많은 시인들, 아니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진정 우리의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날카로운 첫 키스인가, 혹 우리에게도 무의식만이 간직하고 있는 어떤 비극적 존재의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박성필(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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