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변성찬의 영화 속 가족

오랫 동안 한국영화에 ‘아버지의 자리’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지극히 희미하기만 했다. 특히 한때 트렌드를 이루던 대부분의 ‘남성 노스텔지어 영화’에서, 아버지는 부재하거나(<초록 물고기>, <비열한 거리>), 아니면 지나치게 무능하거나 억압적이어서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친구>).

이 영화들은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거나 집을 나오게 된 ‘아들의 영화’였다. 이 아들들은 조직의 보스와 유사 부자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는 대개 비극적 파국으로 끝이 나곤 했다. 이미 그 미약한 전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2004년의 <효자동 이발사>와 <가족>), 2007년에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 영화’의 긴 행렬은, 매우 징후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영화에 일거에 아버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 아버지들의 형상은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먼저, 거의 ‘모성적 부성애’라고 해야 할 만큼 눈물겹고 진한 부성애를 보여주며 가정 내에 남아 있는 ‘모성적 아버지’ 또는 ‘관계적 아버지’가 있다(<날아라 허동구>). 그리고 오랜 동안 가정 밖에 머물다 ‘돌아오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이대근, 이댁은>, <아들>, <눈부신 날에>), 반대로 생활 전선 속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가족으로부터 ‘밀려나는(또는 가출하는) 아버지’가 있다(<우아한 세계>, <즐거운 인생>, <브라보 마이 라이프>). 흥미로운 것은, 이 ‘돌아오는 아버지’와 ‘밀려나는 아버지’의 대립과 공존이다. 또는,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공통적으로 통과하는 일종의 ‘연극성’과 ‘밀려나는 아버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반어법’이다.

‘밀려나는 아버지’들의 세계는 결코 ‘우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삶은 결코 ‘즐겁지’ 않다. 이 세편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형상은 ‘기러기 아빠(또는 펭귄 아빠)’이다. 6,70년대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홀로 중동의 사막으로 나갔다면, 삶이 전쟁터임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한 가지 ‘무기’라도 확실히 챙겨주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해외로 보내고 홀로 남아 ‘보급병’의 역할을 맡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제 자리에 앉아서 가출하게 된 역설적인 존재인 것이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해체해야 하는 이 역설은, 분명 이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징후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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