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변성찬의 영화 속 가족

2007년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거의 동시에 개봉된 세 편의 영화(<이대근, 이댁은>, <아들>, <눈부신 날에>)는 ‘돌아오는 아버지 3부작’이라 일컬어도 좋을 만큼, 어떤 이유로든 가족을 버렸거나 갖지 못했던 아버지들의 ‘귀가(歸家)’를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귀가가 하나같이 ‘연극의 형식’을 빌려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연극성’이 하나같이 마지막에 ‘반전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대근, 이댁은>에서 젊은 가족을 돌보지 않은 채 악극단을 따라 밖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3주기 기일에 그 동안 찾아오지 않고 있던 자식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그 재회가 사실은 ‘가족대행’ 서비스를 통한 ‘연극’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진다(영화 포스터의 메인 카피는, “피보다 진한 돈으로 뭉쳤다?”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귀가의 방법이다. 자식들이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아들>에서 아버지는 젊은 시절 살인 강도죄를 저지르고 무기수 생활을 하다가 15년 만에 귀휴를 얻어 하루 동안 아들을 만난다. 어색하고 서먹해 하기만 하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서히 애틋한 친밀감이 형성되지만, 그것이 일종의 연극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진다. 아들은 이미 죽었고, 아들의 친구가 대신 아들인 척 연극을 했던 것이다.

<눈부신 날에>에서 야바위판 바람잡이로 하루하루를 대충 살아가던 날건달은, 뒤늦게 자신에게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는 딸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녀에게 시한부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부녀관계는 우연한(또는 고의적인) ‘오인’에 의한 것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진다(단, <아들>의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이대근, 이댁은>에서 아버지가 펼치는 ‘연극’은 죽음을 앞둔(또는 죽기로 결심한) 아버지가 수행하는, 이미 사라진 가족(또는 아버지의 자리)을 위한 일종의 제의(祭儀), 즉 애도(哀悼) 행위이다. <아들>과 <눈부신 날에>의 아버지들 또한 결과적으로는 오로지 그 ‘연극의 형식’을 통해서만 귀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세편의 영화는 아버지의 귀가의 불가능성을 말함으로써 귀가를 호소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반전의 형식을 통한 감동의 증폭은, 그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균열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환상의 장치’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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