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특정 시인에 대한 개인적 연민이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때론 시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시인 박진성도 그런 경우였다. 그의 병적 체험을 전해 듣고 적어도 개인적 영욕을 위해 기교를 부리는 자는 아닐 것이라 추측을 했었다. 그러한 추측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최근 그의 시편들이 잘 보여준다.

<어머니의 등>에서도 시인 스스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발작의 기록들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그의 시적 성장은 고통의 대상이 나를 초월하여 어머니로, 그리고 보편적 존재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발작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돌아와서는 울고 있는 제 어머니에게 “왜 울고 그라능겨”라며 태연하게 말을 건넨다. 목욕탕을 다녀왔노라는 그의 거짓말은 어머니의 등에 뭉쳐있는 울분을 감쇄시킨다. 이는 자기치유라는 박진성의 시적 노정을 넘어 고통이라는 주제의 대상을 확대한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가 우선 주목하는 것은 ‘한(恨)’의 정서라 생각된다. <어머니의 등>은 물론, 특히 그의 ‘아라리’ 연작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문학적 성취이며, 동시에 우리 시가 지켜내야 할 하나의 길임에 틀림없다.

박성필(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