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일본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호황기에 기술 투자에 쓰여야 할 자금들이 주식과 부동산에 몰렸고 거품이 스러져가자 부동산·주식 부자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토지자산액 통계를 보면 부동산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1990년부터 3년 동안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한화로 약 5천3백조 가량의 자산이 증발해버렸다. 불황은 끝이 없어 보였다. 개혁해야 했다. 국립대학도 예외일 수 없었다.

2004년 4월 1일, 87개의 국립대학법인이 닻을 올렸다. 2003년 7월 ‘국립대학법인법’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일본의 99개 국립대학은 89개의 ‘국립대학법인 **대학’으로 다시 태어났다. 국립대학법인은 국가가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독립행정법인의 틀을 유지하면서, 대학의 운영은 자율적으로 각 대학의 특성에 맞게 운영되는 형태이다.

‘도대체’ 국립대학법인은 국립대학과 어떻게 다른가? 국립대학법인은 국립대학에 비해 총장의 권한이 상당히 강하다. 이전 국립대학은 문부과학성의 직접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국립대학법인은 총장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게 됐다. 가장 중요한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문부성이 직접 예산을 정했지만, 운영을 대학에 맡기고 이를 평가해 교부금을 주게 됐다.

학생들의 등록금 역시 대학이 책정하게 됐다. 교직원들의 신분은 공무원에서 법인 직원으로 변화했다. 이처럼 법인화는 단순한 국립대학의 법적 지위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립대학 전체를 다시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선진국의 온실 속 화초도 정글을 제 발로 당당히 들어서진 않았다. 일본에서도 법인화 반대여론이 극렬했다. 우선 대학 당국이 반대했다. 자율성을 더 보장하라는 내용이었다. 반대로 학생들은 수업료 인상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립대학 법인화 저지 운동에 나섰다. 교직원들도 반대 행렬에 동참했다.

비공무원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발생할 고용 불안정이 핵심적 이유였다. 하지만 문부과학성이 한화 1600억원에 달하는 특별 예산을 주로 명문 국립대에 집중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자 전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탕을 많이 받은 동경대, 교토대, 오사카대 등 명문대는 울음을 그쳤다. 법인화 후에도 정부로부터 나오는 교부금이 여전히 국립대학법인을 통제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밋빛 계획이 계획대로 되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부에서 하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자율과 경쟁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지만 대학은 여전히 강력한 문부성의 통치 아래에 있다. 총장은 정부 관료를 이사로 임명한다. 문부성은 수업료의 표준책정액과 상한선을 규정한다. 자율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대학간 경쟁을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게 하는 대학 서열화 역시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립대학이 자체 생존 모델을 마련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교부금 지급은 문부성이 포기하기 힘든 좋은 채찍 전략이 됐다.

OECD 국가 중 국립대학의 자율성이 터키와 함께 공동 꼴찌였던 일본 국립대학. 불황이 계속 되며 국민 대다수의 무관심과 소수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진행된 신보수주의자들의 공공부문 개혁 정책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국립대학법인화도 포부는 거대하나 성과는 미비한 용두사미로 끝나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것은 엘리트 관료들에 의해 진행되는 관성적인 개혁이 갖는 필연적 결말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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