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변성찬의 영화 속 가족

이 연재의 첫 회에서 나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가족영화 속에 서로 다른 영화적 판타지가 등장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대안 가족 영화’ 속에는 ‘판타지 장면’이 등장하지만, ‘아버지 영화’ 속에는 ‘판타지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전자의 영화가 ‘영화 속의 판타지’를 보여준다면, 후자의 영화는 ‘판타지로서의 영화’를 보여준다. 물론 두 가지 판타지의 의미와 기능은 전혀 다르다.

‘아버지 영화’의 판타지는, 일종의 ‘방어적 환상’이다. 그 영화들은 ‘(가부장적) 아버지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아버지 자리의 부재’를 필사적으로 부인(否認)하거나(가령, <이대근, 이댁은>, <아들>), 그러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꾼다(가령, <즐거운 인생>).

‘돌아오는 아버지’ 영화들의 ‘연극성’이 그 부인의 징후라면, ‘밀려나는 아버지’ 영화들의 마지막 ‘공연무대’는 그 도피의 징후이다.(물론, <우아한 세계>는 예외이다. 이 영화에서‘무대’에 오르는 것은 나머지 가족이고 아버지는 그 ‘무대’ 밖으로 밀려나 홀로 남는다.) 이 방어적 환상들은 ‘회한(죄의식)’ 또는 ‘위로(연민)’로 점철된 환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재현’된다.

반면, ‘대안 가족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화 속의 판타지’는 새로운 ‘정서(affect)’, 즉 ‘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족의 탄생>에 ‘반복구’처럼 등장하는 세 번의 ‘판타지 장면’은, 모두 ‘가족-되기’를 표현하고 있는 ‘미학적 형상’이다.

세 장면은 각각 미라-무신-채현의 가족-되기의 순간, 선경-경석 커플의 가족-되기의 순간, 그리고 그 모두의 가족-되기의 순간을, 가볍고 경쾌하게(그 장면 속에서 인물 또는 사물들은 모두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한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좋지 아니한가(家)>의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하는 귀여운 ‘우주적 판타지’는, 이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콩가루 가족’의 이야기 속에 낯선 정서를 불어넣는다.

그 기이하고 낯설지만 가볍고 경쾌하기도 한 정체불명의 정서가 이 모래알 다섯 식구의 새로운 ‘가족-되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영화가 꿈꾸는 새로운 가족 윤리는 막내딸 용선의 ‘달-되기’ 또는 가족 모두의 ‘개-되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 속 판타지’들은, 때로는 판타지가 현실에 대한 관습적인 재현을 뛰어넘는 관점을 확보하기 위한 무기이거나 또는 그 재현의 관습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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