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은 종교의 문제를 떠나서도 되새겨볼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있음’과 ‘믿음’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다’는 것들은 정말 있는 것일까?

혹 이러한 것들은 아닐까―예컨대 있다고 믿는 것들, 있어야 하는 것들…. 정끝별은 불현듯 닥친 어떤 운명과 맞서는 방법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에서 그녀의 생을 지탱케 해준 것은 무엇인가? 아니,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질곡에 갇히노라면 우리가 갖는 고민은 무엇일까.

더 나은 내일은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시인이 이미 제시한 듯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약간의 첨언뿐이다.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텅 빈”이란 구절의 끝에 “(그)것들을 끌어안아라”라는 사족을 붙이는 일. 위 시편에서 그녀를 ‘막막한 나락’으로 떠밀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자기 희망의 부재이다.

절망과 희망, 그 엷은 차이, 그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은 그것이 무엇이든 한 번 끌어안아보는 일이다. 와락!,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제시하는 유일한 길이리라. 어쩌면 그것이 그 깊은 절망을 그리고 넓은 허공을 채우는 단 하나의 길인지 모른다.

박성필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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