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밤 9시 30분 밀양역, 한 남학생이 매표소에 묻는다. “봉하마을 가는 셔틀버스가 언제까지 있죠?”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은 마지막 날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1 봉하마을 가는 셔틀버스 안
셔틀버스에서 다음날 수업이 있음에도 봉하마을을 향하고 있다는 김윤정(대구 카톨릭대 4)씨를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 정말 대쪽 같은 분이었다고, 외유내강을 체화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지체 없이 말한 그녀는 “국민들과 끝까지 소통하려고 노력했다는 점, 그 점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라며 노 전 대통령을 평가했다.

#2 봉하마을 빈소 가는 길

마을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조문을 하고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마을입구에서 봉하마을 내 빈소까지의 거리는 1km쯤. 3분의 1쯤 걸어왔을까. 한 외침이 들렸다. “이렇게 와주시니 천사 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으세요” 이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권옥자(대전, 70)할머니였다.
할머니를 만난 건 밤 10시가 넘은 시각. 같은 날 대전서 오전 11시 54분 열차를 타고 와서부터 줄곧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할머니는 장지까지 보고 갈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 청문회(5공 청문회)를 봤어요. 그때 우리가 엄청 힘들었어요. 생활이 힘들었는데 청문회를 보며 힘을 얻었어. 삼일절에도 사월초파일에도 어느 절에 가든 절에 다닐 때마다 두 분 건강하시라고 오래 사시라고 기원했는데… 그런데 옥자 마음을 모르시고 떠나셨네 진짜... 너무 서운해요”
2004년에도 대전역 앞에 나가 탄핵반대운동을 했다는 할머니는 어려웠던 시절 힘이 됐던 노 전 대통령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1km 남짓한 거리를 2시간 여 동안 걷고 서기를 반복하며 가는 길. 힘들만도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그 길을 걸었다. 불평 대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처로움이 묻어난 말이 들렸다. “오늘 우린 몇 시간 힘들어도 조금만 더 가면 되지만 대통령님은 먼 길을 가셨는데 얼마나 힘드실꼬…”

#3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상주들을 격려하는 사람들, 그렇게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을 가슴에 심었다. 7일간 총 백만 명의 조문객이 봉하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서거했을 때는 40만명이 명동성당을 찾았다. 전대미문의 조문행렬이다.

조문을 마치고 안경 너머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휴지를 주섬주섬 꺼내던 김태일(부산, 37)씨는 아마 노 전 대통령에게 미안해서 많이 오셨을 것이라고 했다. “개혁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기대치가 높았는데 현실과 이상은 다르니깐 진보 쪽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생각해보면 비판보다도 그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느냐 그런 부분 있지 않습니까. 뽑아놓고 비판에만 익숙했지 지원을 해주지 못한 것이 다 끝나다 보니 미안해가 많이 오셨을 거예요”

#4 미스터 클린, 그를 그리는 이유

외신으로부터 부패와 타협할 수 없는 개혁활동가이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은 그. 그의 정치활동이 성공적이었다고만, 그의 정책이 모두 호평 받을만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는 이유를 노무현 전 대통령의 1995년 부산시장 낙선 후 발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과 이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 그의 인생이 국민들의 가슴을 무척이나 사무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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