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 들어가며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을 표방하며 공자를 숭상하고 그의 철학을 존중하며 700여년이 넘도록 살아왔다. 유교 속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공부했으며 그래서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여겼던 대한민국에서 ‘유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고 외친 화제의 책,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 책의 저자는 한일합방, 6·25, IMF 세 가지 사건들은 그저 우연한 것이 아닌 우리 내부의 필연적인 원인 때문이었으며, 이 원인으로 바로 유교를 지목하고 있다.

이 책은 유교는 처음부터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고 도덕의 가면을 쓰고 출발한 것이며, 유교의 이상사회인 대동사회 역시 픽션의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공자의 도덕은 정치, 남성, 어른, 기득권자,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으며 이는 젊음과 창의성 말살, 가부장의식, 혈연적 폐쇄성, 분열본질을 야기했다고 지적한다. 또 이런 폐해를 ‘공자 바이러스’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유교를 비판한다. 첫째는 지나친 인문(人文)의식의 만연이다. 이 때문에 법치(法治)가 되지 않고, 인치(人治)의 문화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이 인문의식은 효 사상으로, 충성사상으로, 결국에는 충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사회에서 법까지 주무를 만한 인치 문화의 만연은 사람 위에 사람을 군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는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따른 뒤돌아보기 문화이다.

대한민국의 ‘옛날만세’정서가 미래를 지향하는 젊은 정신의 발목을 수시로 붙잡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옛것에만 절대적 가치를 두어 자꾸만 낡은 책을 뒤져 해답을 찾으려는 우를 범한게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뒤돌아보기 문화에 비롯된 것으로, 조상숭배를 넘어선 주검숭배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죽으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또 예를 갖추어 제례를 지내야 한다”라고 한 ‘예(禮)’를 앞세운 문화는 화려한 분묘 치장문화를 부추겼으며, 결국에 사람을 생매장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풍수지리설과의 묘한 결합으로 인한 묏자리 쟁탈로 번졌다고 말한다.


공자 논쟁의 2라운드를 여는 책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에 대해 ‘진정으로 공자를 아는가?’라고 반박한다. 제 나라와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서양’의 부정적 시각으로만 썼다는 것이다. 왜곡된 공자로 진짜 공자를 죽일 수 없다며, 유교의 아류에 불과한 부분만을 확대해석했다고 재비판한다. 전통을 부정하는 방법으로써 공자를 죽이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함은 사대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며, 이는 지식인으로서의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한다. 오히려 21세기 밀레니엄시대에는 실천적 사랑인 ‘인(仁)’의 유교적 가치가 적극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IMF의 원인으로 공자가 아닌 정경유착, 사치성 소비문화, 지하경제를 지목한다. 이는 오히려 공자가 “경제를 튼튼히 함에 큰 길이 있으니, 생산자는 많고 실업자는 적으며, 생산 활동은 빠르게 하고 소비를 더디게 한다면 재산이 항상 족하게 된다”라 한 말을 지키지 않아서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유교는 기득권자를 위한 수직적 윤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삼강(三綱)’은 유교의 본질이 아니며, 핵심은 수직관계가 아닌 인륜관계의 상호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 ‘오륜(五倫)’에 있음을 밝힌다.

또 이 책은 위의 ‘공자 죽이기’에 다시 반박하는 세 가지 주장을 편다. 첫째, 인문의식은 반드시 덕이 전제되어야 한다. 맹자의 혁명설에 알 수 있듯이, 충성 받는 사람의 덕의 유무에 ‘충(忠)’의 실행이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어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수단이 ‘온고(溫故)’이고 그 목적은 ‘지신(知新)’에 있음을 강조한다. 온고지신은 두 발 전진을 위한 한 발 후퇴일 뿐, 과거에 갇혀있겠다는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며 내세사상도, 기복사상도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상이므로 이것이 주검숭배에 이어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조상숭배와 주검숭배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나를 있게 해준 조상에 대해 예를 표하는 것은 효의 연장이지, 주검을 숭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자를 죽이냐, 살리냐의 논쟁은 결국 새 시대를 앞둔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고, 유교로 상징되는 전통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과거의 소중화(小中華)의 속에서는 의리를 저버렸다고 평가했지만, 현재에는 실리 외교로 재조명 하는 것처럼 역사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공자를 죽이는 것일 수도, 살리는 것일 수도, 혹은 제 3의 대안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을 찾는 숙제는 우리 몫이다.

문유미 기자 dbal616@uos.ac.kr









길고 긴 여름이 끝났다. 지나간 휴식의 아쉬움에 대해 누군가는 당신에겐 그나마 휴가가 있음을 행복하게 여겨야 할 거라고 힐책한다. 다른 누군가는 잡소리 집어 치우고 업무에 매진하라고 다그친다. 이제 익숙해진 이런 풍경은 학생들의 방학에도 예외는 아니다. vacation이 라틴어 vacatio, 즉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방학이란 부족한 공부를 메우기 위해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시기일 뿐이다.

월요병이란 말은 괜한 것이 아니다. 달콤한 휴식은 삶의 축복이 아니라 다음날의 ‘질병’을 야기하는 병원균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사색’을 즐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도를 아시는 분’ 혹은 ‘백수’로 낙인찍힐 게 분명하다. 21세기 백과사전에서 ‘사색’이란 단어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뜻풀이에 ‘쓸데없는 데 신경쓰는 잡스러운 일’ 정도로 소개되지 않을까? 대표적인 동의어로는 ‘사치’란 단어가 적혀 있을 테고 말이다.

오늘날 사색은 낯선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엄마의 잔소리를 수반하는, 그래서 쫓아내야 하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거나, ‘느리게 사는 법’, ‘명상하며 살아가기’ 류의 책을 정독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고상한 취미가 되었다. 그런데 ‘사색의 고수’라니! 앞으로 소개될 사색의 고수들 중 몇몇은 남들로부터 망상가로 치부되었지만, 몇몇은 비범한 인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몇몇 고수들로부터 한 수 배우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여행 가이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여행을 떠나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 우리의 처지, 즉 좁게는 ‘지금 여기서 이렇게 궁상맞게 살아가는 이유’를 해명하는 일이자, 넓게는 ‘이 사회가 덜거덕 거리면서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긴 여행 끝에 우리는 사회를 조금은 더 매끄럽게 굴리는 법을 터득할 지도 모른다. 물론 더는 궁상맞지 않게 살아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때쯤 우리 스스로 ‘사색의 고수’가 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을 시작할 때가 왔다. 사색의 고수를 찾는 여행, 그 출발점은 어디일까? 때로는 질문 속에 답이 있는 법! 원래 사색한다는 말은 조용히 서서 무언가를 찬찬히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오래된 말이 있는데 바로 고대 그리스어인 ‘테오리아(theoria)’다. 오늘날 ‘이론(theory)’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이치나 근본 따위를 캐묻는 지식 체계’가 단지 바라보는 것에서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여유로운 사색의 도정에 접어들었으니 너무 성급한 질문은 말자. 다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 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우선, 고대 그리스는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특출한 조건을 갖춘 곳이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는 철저히 문명의 변방이었다.

그리스인들이 허본좌 같은 신통력을 가지기라도 했었던가? 그럴 리가! 그들에게 관조와 명상, 이를 통한 대화와 토론은 그저 평범한 일상사에 불과했다. 그래도 상상이 안 된다면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참고해 보길. 플라톤의 저서 『파이드로스』의 시작 부분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들의 대화를 곁에서 엿듣고 있다는 심정으로 읽어 보자. 만약 약간이라도 흥미를 느낀다면, 당신에겐 사색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파이드로스여. 그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파이드로스 : 오, 소크라테스. 나는 케팔로스의 아들 리시아스와 있다가 성 밖으로 산책을 가는 중이오. 당신과 나의 친구, 아쿠메노스의 충고대로 야외에서 산책을 하려는 거지요. 회랑을 따라 걷는 것보다는 기분이 더 상쾌해진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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