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국가 유지의 최소 기본 요건, 각 나라마다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염려 마라. 열심히 투쟁하라.” 이경해 열사는 이 말을 남기고 치열했던 투쟁의 삶을 마무리했다. 농업 개방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국민들도 ‘도대체 그는 왜 자살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칸쿤을 다시 보게 됐다. 이경해 열사에 대한 대규모 추모 행사도 연일 진행되고 있다. 우리대학 총학생회는 학생회관에 분향소를 마련해 이경해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경해 열사는 우리대학의 전신인 서울농업대학을 1974년에 졸업한 우리대학 동문이다. 정현화(수학 99) 총학생회장은 “지난 18일 현대아산병원으로 이경해 선배의 조문을 다녀왔다. 가슴이 아팠다. 나도 농활을 많이 갔고 농민의 안타까운 현실을 많이 보아왔지만 제대로 실천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이경해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제5차 WTO 각료회의에서 가장 큰 이목이 집중된 분야는 농업 부문이었다. 회의장 부근에서는 전세계 농민단체, 시민단체가 연일 시위를 벌이며 ‘WTO 협상에서 농업 분야를 제외하라’고 외쳤다. 농업 부문의 세계화, 자유 무역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는 ‘농업이란 국가 유지와 민족 생존권 및 자존의 최소 기본 요건으로 주식 등 기초 품목은 각 나라마다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쌀을 비롯하여 주곡 및 축산물은 각 나라마다 그 비교역적기능(N.T.C - 농업이 갖고 있는 사회, 문화적인 기능)을 살리기 위한 정책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농산물 수입 10개국(G-10) 그룹의 입장도 이와 같다. 농산물은 단순히 사고 파는 상품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G-10 그룹은 시장 개방은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수와 협상력에서 상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다. WTO 체제 자체가 개방과 경쟁을 통한 자유무역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위시한 농산품 수출국가들은 이를 근거로 공세적인 주장을 펴면서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협상 테이블에서 더 설득력 있게 개방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선언문 초안도 농산물 수출국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내용이었다.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지만 칸쿤 회담의 결렬로 한국은 몇 달이나마 시간을 벌었다.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농업 분야 시장 개방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미 지난 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을 10년 동안 유예 받았기 때문에 내년에는 관세화를 통한 전면 개방이나 수입물량 확대를 결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만약 쌀 시장마저 대폭적으로 개방된다면 말 그대로 식량 안보의 위기 상황이 닥칠 것이다. 중국이나 미국산 쌀 가격은 국내산 쌀의 16∼20%선이기 때문에 380%의 관세를 매겨도 우리나라 쌀보다 10%이상 싼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보조금도 마음대로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농업이 얼마나 이런 장기 과잉 공급 상태를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의 농촌 현실을 보면 이런 위기 의식은 더욱 현실성을 띤다. 지난 10년 동안 농민은 35%가 줄었고 매년 50만 명의 농민이 논밭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고 있다. 우리대학 경영학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농사로 먹고 살기는 정말 힘들다. 있는 땅 놀리기가 아까워서 농사짓는 정도이다. 추석 때도 고향에 내려갔지만 농사짓기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라고 농촌의 현실을 말한다. 이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국 농업에 쌀시장 개방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혹자는 공산품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 농산물 개방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성홍 전 농림부장관은 “우루과이라운드 때도 우리 정부는 사료를 많이 살 테니 소를 적게 수입하도록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사료는 사료대로, 소는 소대로 협상이 따로 진행된다. 농업을 희생하고 그 대가로 공산품을 얻겠다는 것은 착각이다”라고 일축한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가짓수는 많지 않다. 개방을 하더라도 최대한 점진적으로, 그리고 우리 농가가 최대한 적은 충격을 받도록 협상에 나서야 한다. 농업은 무너지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힘들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농업이지만 지금이라도 농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는 이미 지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이후 농어촌구조개혁사업이라는 이름으로 53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농가들은 여전히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지금 나오는 지원책들이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충분한 정책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농민들은 농사지어서 떼돈 벌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 있게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경해 열사의 죽음이 벼랑에 몰린 한국 농업을 다시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고인의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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