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최근 우리의 시에서 실어증적 징후가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다. 저마다 그러한 징후를 드러내게 된 까닭은 다르겠지만, 일단 최근 시의 한 경향이라 말해두자. 나희덕의 근작에서도 그러한 시편을 몇몇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시편들이 나희덕의 시적 지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어디에 두고 왔을까 / 두 귀”라는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더 충격적이다. 『정신적인 귀』를 통해 참된 감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가운데, 새로운 ‘정신주의’를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보자!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난청 혹은 실어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이 막막한 상황, 그런데 더욱 그녀를 막막하게 하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정신’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징후를 보이는 시적 화자 자신은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絃)을 울리고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꼭 헛되기만 한 것이 무엇이랴. 필자는 이 시에 대한 독후감으로 ‘제3의 시를 향한 또 하나의 시도’를 제출하고 싶다.

그러니까 고전의 틀에서 우리의 시를 모색하던 시기를 제1세대, 서양 사조를 수입하여 새로운 시를 모색하던 시기를 제2세대라 한다면, 최근 시의 새로운 초월은 제3세대의 시 혹은 그러한 시를 향한 시도인 것이다. 과연 문자의 감옥을 우리 시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박성필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