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_ (8) 에피쿠로스 학파

찬란한 그리스 문화의 혜택을 자양분 삼아 이제 막 싹을 틔웠던 사색의 역사는 오랜 내우외환으로 서부 지중해의 패자가 몰락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 문명은 사색의 산파이자 동시에 족쇄였다. 그리스 민주정은 사상의 풍요를 낳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폴리스 체제의 협소함은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이제껏 믿어 왔던 ‘세상의 중심’이 실은 작은 우물에 불과했음을 깨닫자마자 각자의 짐을 꾸린 뒤 더 큰 물을 찾아 나섰다.

물길은 그리스 북부의 변방에서 열렸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억울한 피해를 본 마케도니아는 고래 싸움의 새우 신세를 면해야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일까? 그리스의 쇄락을 호기로 여긴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는 이참에 스스로 고래가 되기로 결심한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목표는 페르시아! 이렇게 시작된 동방 원정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아우르는 신생 제국의 탄생은 내부의 분열로 단명에 끝났으니, 우리가 이 시기를 헬레니즘 ‘문화’로 더 잘 기억하는 이유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와의 결전을 앞두고 지중해 동부지역을 점령할 무렵, 사모스 섬에서 명민한 아이가 태어났다. 오늘날 ‘식도락가(epicure)’이라는 말에 흔적을 남긴 사색가 에피쿠로스가 바로 그다. 키레네학파의 계승자답게 그 역시 쾌락을 중시했지만 미식(美食)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빵과 물로 연명하며 호사스런 삶의 쾌락을 멀리할 때, 나의 몸은 상쾌하기 그지없네!” 언어의 오용에서 이 보다 심한 경우가 또 있을까? 마음의 평정을 그는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는데, 당시 전란기의 처세로서는 쉽게 수긍이 갈 만하다.

하지만 전란이 걷힌 후라면 아타락시아는 불필요한 게 아닐까? 마케도니아의 바통을 이어 진짜 제국으로 우뚝 선 로마의 황금기에 활동한 루크레티우스는 지금이야말로 아타락시아가 필요한 때라고 역설했다. 아니, 모두들 “팍스 로마나!”를 외치던 때 이게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관점의 이동을 주문한다. 제국의 입장에선 ‘평정’일지 몰라도 개인의 시각에선 지독한 ‘소외’일 수 있으니. 그렇다면 소외의 원인이 뭘까? 시인이었던 그는 한 편의 장시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우회적으로 밝혔다.

그의 시는 정신적 스승에 대한 노골적 찬양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이 종교의 잔인한 발부리 아래 짓밟히고 더럽혀졌을 때 그리스의 한 사람이 처음으로 종교에 맞섰으니, 그는 종교에 반항하고 도전한 첫 사람이었다.” 소극적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를 반항아로 그린 건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정작 중요한 건 그가 인간의 불안과 공포의 주범으로 종교를 꼽았다는 점! 여기에 이기와 탐욕을 부채질한 사유재산이 추가로 고발되면서 그의 ‘소외론’은 완성된다.

이러니 에피쿠로스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정원의 삶’을 꿈꾼 그들과 반대로 로마는 작은 땅뙈기에 만족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따라서 제국의 철학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