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9)스토아 학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서는 자 반드시 다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사색의 역사도 예외일 순 없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BC 155년 경 처음으로 로마의 문을 두드렸지만 입도 뻥긋하기 전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뒤늦게 루크레티우스에 의해 전파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가 시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로마행 티켓은 그들을 가장 적대시하는 세력에게 돌아갈 운명이었고, 그 정점에 스토아학파가 있었다.

금욕적인 삶을 뜻하는 ‘스토익’(stoic)이란 단어가 잘 보여주듯 스토아학파의 행동지침은 절제와 금욕이었다. 그런데 검소한 삶이라면 에피쿠로스학파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사실 키프로스의 제논이 학파를 창시할 때만 해도 세속의 욕망을 부정하고, 검소한 삶과 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뚜렷한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제논의 학설이 로마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종교관이 작용했다. 신의 역할을 과감히 축소했던 에피쿠로스와 달리 제논은 자연에 선을 지향하는 힘을 불어넣어준 이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혼란한 사회에선 무신론이 각광받겠지만 정복전쟁을 거쳐 제국의 반열에 오른 로마의 입장에선 한갓 우연의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했던 에피쿠로스의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초월해 신성과의 합일만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면 스토아학파 역시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키케로와 더불어 스토아주의를 로마에 전파한 세네카는 귀족 출신다운 수완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보다 세속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일종의 ‘체념’과 ‘만족’의 철학이었다.

만약 우주가 이성적인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세상 역시 그러한 계획 속에서 돌아간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고 헛되이 노력하겠지만, 현명한 자는 오히려 세상의 이치에 따라 자신을 맞추며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욕망하라!” 그들의 주장은 로마의 팽창정책이라는 물질적인 토대 위에서 지지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욕을 먹는 것과는 반대로.

스토아의 학설이 로마의 체제유지에 기여했다면, 이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사회통합에 공을 세웠다. 주전선수가 노예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해방된 노예의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인생살이를 공중목욕탕에 비유하곤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물을 튀기더라도 항의하지 말지니. 어차피 그 곳에는 그런 인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좀 더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신들이 하는 일은 섭리로 충만하며,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의 치세 이후 로마가 쇠락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섭리가 작용한 걸까? 아들 콤모두스는 폭군으로 유명했고 분열과 반목은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출산을 위한 산통에 불과했다. 스토아주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돼 유럽 전역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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