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언젠가 “도시란 뭘까”라는 질문에 무심코 “욕망의 쟁투”라 답했다. 아마도 소비문화를 두고 한 얘기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뜻밖의 대답을 했노라 하는 자책이 없지 않지 않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는 어딘가 슬픈 구석이 없지 않았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도시는 진정 ‘욕망의 집어등’이 아니던가. 이러한 점을 상기할 때 김수복의 시는 조금 색다른 시로 읽힌다. 일종의 기행시, 그러니까 부제의 ‘살라망까’라는 지명이 지칭하듯 여행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이 시는 도시의 욕망을 자연으로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만큼 자본주의적인 것이 없다면, 아니 그러한 것을 차치하더라도 저 유럽의 도시에서 쓰여진 이 시에서 도시가 자연으로 은유되고 있다는 점은 새삼 주목할 만한 것이다. 김수복은 욕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불빛’이 ‘마녀’가 된다고 말한 뒤, 줄곧 도시의 풍경을 자연으로 투사한다.

왜일까? 추측컨대, 그 역시 도시를 소비의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또 그 역시 그러한 공간의 풍경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꼈으리라. 나는 저 쌀라망까에서 쓰여진 이 시를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 삶을 잠시 떠올려본다. 혹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욕망을 투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욕망들은 저 ‘절벽’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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