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고 절망하던 한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신문을 읽고 다양한 책들을 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현재 주간 <무비위크> 스텝평론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선정위원으로 활동하며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성률(국어국문 91) 동문을 만났다.


문학과 함께 했던 대학시절

강성률 동문은 세 번의 대학입시 끝에 우리대학 국문과에 진학했다. 시인이 되고자 국문과에 입학했던 그의 대학생활은 모범생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에 가까웠다. “재미없던 수업은 그냥 안 들어가기 일쑤였고, 학점 역시 별로 좋지 않았죠” 하지만 마냥 놀면서 보낸 것은 아니었다.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늘 문학이었다. 국문과 사람들과 매주 스터디를 했고 토론과 글쓰기를 통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시집과 소설을 매주 한 권 이상 꾸준히 읽었다. 그는 “그 때 읽었던 책과 당시 연습했던 글쓰기 실력은 아직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걱정 없이 하고 싶던 것을 마음껏 했던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국문과 학생에서 영화평론가가 되기까지

원래는 시인의 꿈을 갖고 대학에 입학했던 그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시나 소설보다는 영화 비평에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에 푹 빠져 1주일에 2편 이상씩 꼭 챙겨봤어요. 영화를 볼 때만큼은 괴로운 입시 현실에서 벗어나 스크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어쩌면 그 때부터 영화 평론과의 인연은 시작됐을지 모른다. 강성률 동문은 영화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많이 읽었고 팀을 만들어 함께 공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외부로 나가서 활동을 했고 영화 관련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학교와 학과 모두를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실에 겁부터 났다. 장학금 지원도 없어 막막했지만 일단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과외와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교수와 선배들로부터 비평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지면 추천을 받아 그때부터 조금씩 영화평론을 시작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그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한국에서 평론만으로 먹고 살기엔 삶이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 진보적인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영화 평론’이라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유명한 작가들을 제외하면 글만 쓰며 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들었던 만큼 다른 직업에 대한 유혹은 없었을까. 강남에서 큰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전임 강사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괜찮은 보수에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아내가 “지금 학원 강사로 간다면 거기서 끝난다. 힘들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 영화 평론을 하며 살자”고 했고 이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영화평론가와 교수로서의 삶

한 가지만으로도 벅찰 것 같은 영화 평론과 교수라는 두 가지 직업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영화평론가는 비평을 통해 영화의 여러 가지 시선을 보여줄 수 있다. 감독이 영화로 세상을 보여준다면 영화평론가는 그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 영화 자체가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비평을 통해 작가의 세계가 어떤지, 이 영화가 영화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등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요”

또한 그는 자신이 교수에 임용되기까지 과정을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8월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 해 11월에 임용이 됐기 때문이다. 강성률 동문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자신도 함께 배운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 많은 학생들이 학점 관리와 어학 점수 관리 등 스펙 쌓기에 열중하다보니 대학이 취업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가져야

“목표를 세워라!” 이미 수많은 명사들이 대학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다소 식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강성률 동문은 개강 첫시간이면 매번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20살. 인간의 수명을 80살이라고 가정했을 때 앞으로 남은 시간은 60년이다. 이 중 기억나지 않는 10년을 제외하면 10년을 6번 보낼 만큼의 시간이 있다. 강성률 동문은 “대학 시절의 4년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인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것인지는 본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글이 쓰고 싶었다. 약간씩 바뀌긴 했지만 시, 소설, 비평에 이르기까지 ‘글’이라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미래가 불확실했던 탓에 많이 불안했다.

“서른에 결혼을 했지만 대학원생인 탓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부인이 취업해 있는 동안 저는 논문을 쓰고 있었고 아이도 태어났죠. 돈이 없어서 선배들에게 더 많은 지면 소개를 부탁하기도 했어요. 이 모든 것이 뚜렷한 목표를 갖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 했어요”라며 힘들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덧붙여 그는 “스펙을 쌓는데만 열중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학점과 토익 같은 점수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한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기 전에, 자신에게 맞는 진정한 ‘좋은 직장’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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