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그의 나무상자 앞에
내 슬리퍼가 한짝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옆에서 맨발인 채 자고 있던 아이에게는
너무 크고 헐렁하겠지만
또 굳이 신고 다녀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저 슬리퍼를 신고서 앉아 있을 것이다

검은 진흙으로 질척한 언덕 아래를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잠시 두고 온 것만 같다
어디선가 지친 몸 쭈그리고 앉아서
길 가다 말고 다시 신고 있어야 할 그 슬리퍼는

- 김태형, 「두고 온 신발」 중에서

시가 세계의 인식과 얼마쯤 관계한다면, 위의 시를 두고 ‘기억’에 관한 시편이라 말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물론 이러한 언급은 시에 대한 정밀한 탐색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시의 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잠시 두고 온 것만 같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찾기 위해 시적 주체를 좇아보자. 아마도 시적 주체는 신발을 고치러 갔으리라. 그는 신발을 찾기 위해 끌고 갔던 슬리퍼를 두고 왔던 것 같다. 기억에 관한 위의 시적 서술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내 마음대로 ‘슬리퍼’라는 시어를 지우고, 거기에 ‘기억’이라는 말을 채워본다. “너무 크고 헐렁”한 것, 또 “굳이 신고 다녀야 할 필요도 못 느끼”는 무엇. 어쩌면 우리에게 기억이란 그런 존재이리라. 그러나 그 기억에 관한 나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우리는 그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시인이 “그래도 누군가 저 슬리퍼를 신고서 앉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제가 벗어놓고 온 슬리퍼에서 새롭게 찾는 이러한 ‘기억’의 의미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 없이 소중한 충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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