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 (8)근대철학의 통일과 해체

17세기 근대철학의 흐름은 좋든 싫든 데카르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실체에 대한 파격적인 그의 해석은 대륙 합리론자의 손을 거치면서 세분화·정교화되었다. 반면 감각과 경험을 중시한 영국인이 보기에 저들의 논의는 거추장스러운 군살처럼 보였고, 실체를 하나 둘 제거하다 보니 결국 흄의 극단적 회의론까지 이르게 되었다. 실체는 없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철저히 실용적인 의도에서 나온 이런 반응은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일 뿐,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현실의 삶과 정치에 유용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그 항해의 끝에 가닿은 곳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하지만 대륙지역, 특히 프랑스의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그곳은 여전히 ‘태양왕’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앙시앙레짐의 나라였고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모든 삶은 철저하게 신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유관념’과 ‘실체’ 따위를 운운하는 철학자들의 교설이 먹힐 리 없다. 오히려 기층의 불만은 자유분방하게 글을 쓰는 문필가들의 펜에서 터져 나왔다. “전하의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농업은 거의 멈추었고, 공업과 상업도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거대한 병원입니다.” 소설가 페늘롱이 『루이 14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이 점잖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조소 섞인 글을 보자.

“그는 셋이 하나일 뿐이고, 사람들이 먹는 빵이 사실은 빵이 아니며, 그들이 마시는 포도주 역시 포도주가 아니라고, 이 외에도 이런 유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믿도록 만드니까요.” 짐작하듯 여기서 ‘그’는 교황을 가리키는데 이렇듯 신묘한 능력으로 인해 그의 지위는 위대한 마법사로 강등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당대의 퇴폐상을 꼬집은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저자는 놀랍게도 우리에게 정치사상가로만 알려진 몽테스키외다. 고지식한 이론가가 문학적 도발을 감행한 것도 놀랍지만, 그 같은 이들이 불경스러운 조소를 날릴 만큼 사태의 심각성은 위험수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데 밝은 ‘빛’만한 것이 있을까? 구체제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샅샅이 비추기로(enlighten) 작정한 계몽주의의 위력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하나 둘씩 가세하면서 커져만 갔다. 불씨를 지핀 이는 볼테르였다. 영국의 자유분방함을 온 몸으로 체험한 그는 근질거리는 입으로 신과 군주의 은총 없이도 개인의 삶이 꾸려질 수 있다는 희망을 역설하고 다녔다. 하지만 신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신론자의 주위에는 보다 급진적인 이들이 들끓었다. 『백과전서』를 주도한 디드로는 신 존재를 부인했고, 그 책의 구상이 싹텄던 돌바흐 남작의 집은 아예 ‘무신론자의 회당’으로 불릴 정도였단다.

이신론에서 무신론까지, 관념론에서 유물론까지 잡다한 사상의 집결지인 계몽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대안을 위해 뭉치기보다 기존 질서의 해체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럴 경우 입장들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같은 흐름에 있으면서도 낭만주의를 부르짖은 루소는 이런 갈등적 상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회계약론』은 개인의 이성적 계약을 통해 합리적인 ‘일반의지’를 낳을 수 있다고 본 반면, 또 다른 저서 『에밀』은 문명의 타락에 맞서 ‘고결한 야만’을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의 급진성은 구체제의 부실한 하체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체계성은 불안과 우려를 낳으면서 체계적 이성비판의 길을 예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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