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9)근대철학의 통일과 해체

흔히 현실과 사상의 역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변화의 배경에 현실의 처지와 그에 대한 근심이 놓여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해마다 발표되는 대통령의 국정과제를 떠올려보라. 무릇 비전(vision)이라 함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상의 선견지명을 뜻하지만, ‘녹색성장’에서 ‘공생발전’으로 변천하는 비전사를 보면 미래의 ‘전망’이 현실의 ‘수습’과 ‘뒷북’으로 쪼그라드는 궁색한 형국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단위를 국가차원으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18세기로 전환되는 유럽의 상황은 이러한 현실과 사상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시대였다.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의 갈등이 해외에서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확장되던 국면에서, 유럽의 열강을 자처한 영국과 프랑스는 중세의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각축이라는 전통적인 사색적 쟁점은 체제가 낳은 모순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각각 ‘경제학’과 ‘사회학’의 문제로 신속히 전환됐다. 반면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된 채 중세가 남긴 숙제를 미처 끝내지 못했던 독일의 경우에는 최첨단의 학문들이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사색의 문제는 뭐였을까?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데카르트가 던진 최초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을 벌였지만 각자의 입장만 고수한 채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무엇이 실재하는가?”란 존재론적 물음과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란 인식론적 물음은 채 진지하게 답해지기도 전에 각각 합리적 독단론과 경험적 회의론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만년 지각생 독일의 혈통을 가졌던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삶을 학문적 탐구에 바쳐가면서 이 문제에 천착했다. 그리고 그 결실은 매우 뒤늦게 찾아왔지만 철학의 역사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이런 자신의 해결에 흡족했던 걸까? 임종을 앞둔 그의 한마디에는 자신감을 넘어 약간은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다. “이만하면 충분하다(sufficit)!”

저 유명한 ‘시간’과 관련된 칸트의 일화로부터 시작해 보자. 매일같이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나가 이를 본 이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꼼꼼함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시간을 어겼다는 실수담에서, 우리는 계몽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계몽주의가 갖는 빛 못지않게 그 그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근대과학과 결합한 이성의 혁신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을 등지고 저 홀로 독야청청할 때 필연적으로 빠지는 독단의 늪은 피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는 이성을 통한 인식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자만 대신 그것이 가능한 조건과 제약을 준별하기 위해 이성을 법정에 내세우기로 결심했다. 이성‘비판’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인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실로 이 한 문장에 칸트의 고민과 해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쉽게 말해 경험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것이 참된 인식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를 수용하고 가공하는 변치 않는 선험적 형식이 인식주체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 그야말로 절묘한 조화이자 교묘한 절충이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문제의식을 골고루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장을 던졌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그의 만족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후학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에게 칸트의 공헌은 ‘필수’적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의 싹은 자라고 자라 결국 독일 관념론의 나무를 키워 냈다.

신재성(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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