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의한 다수의 역사 왜곡 존재
역사에 대한 관심 점점 줄어들고 있어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자신들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 연구에 착수했고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역사는 노래, 동화집 등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마치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예로 의자왕의 삼천궁녀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있다.

▲ 부여에 위치한 의자왕의 묘.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과연 존재했을까?’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존재했을까?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백결선생 떡방아 삼천궁녀 의자왕…”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동요다. 여기서 의자왕은 궁녀를 삼천 명이나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의자왕의 이름을 한자로 풀이해 보면 의로울 의(義), 자애로울 자(慈)다. 즉,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왕의 사후에 결정되는 왕의 명칭은 왕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탕하다고 알고 있는 의자왕이 어떻게 이런 명칭을 얻게 되었을까? 과연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실존하는 것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 칭했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당나라 『주서』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무렵 백제의 수도 사비의 궁녀가 될 수 있었던 연령의 대상자는 1만 5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의자왕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비에서 궁녀가 될 수 있었던 여성 중 약 20%가 궁녀라는 말이 된다. 이는 역대 왕조의 성인여성 인구대비 궁녀의 비율을 봤을 때 믿기 힘든 수치다.

또한 한 나라의 국력은 얼마나 많은 궁인을 거느릴 수 있는지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백제보다 국력이 세고 인구도 훨씬 많았던 조선 후기에도 궁녀는 500~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봤을 때, 의자왕이 궁녀를 삼천 명이나 거느렸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천궁녀 의자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원래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과거 일부 문인들이 백제 멸망의 비애를 담아 읊조리던 문학적 표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전에 존재하던 집권부의 위상을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백제 멸망의 원인을 한 왕의 방탕함으로 왜곡했다. 이후 ‘의자왕이 사치스러우며 궁녀를 삼천 명이나 거느렸다’는 내용이 사실처럼 통용됐다.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 이야기’의 진실은?

문학적 표현이 사실처럼 왜곡된 의자왕의 삼천궁녀 외에도 우리나라 근대 신문이 제기한 설화가 일본에 의해 사실인양 받아들여지게 된 경우도 있다.
고산자 김정호하면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여행자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김정호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온 지방을 세 번 답사했으며,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렸다. 여행을 통해 얻은 자료를 근거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대동여지도’ 때문에 국가의 지리정보가 유출될까봐 두려워 김정호를 감옥에 가두고,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없앤다. 그는 심한 문초를 당한 끝에 옥사하고 만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 이야기’는 대체로 이러하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기 권력기구의 핵인 비변사에서 김정호에게 지도제작을 맡겼고, 김정호가 지도 제작하는 데 있어 비변사의 수많은 지도를 참고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또한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대동여지도’ 목판본은 소각되지 않고 남아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김정호가 독자적으로 전국을 누비며 지도를 제작하고, 지도를 제작한 죄로 옥사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렇다면 왜곡된 ‘김정호 이야기’는 어떻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일까?

일제 시대 때 모 일간지가 김정호가 직접 측정해 지도를 만들었다고 알리기 위해 백두산등정설, 전국 답사설 등을 만들어낸다. 동아일보가 설을 제기한 의도는 당시 일본 근대 최고 지도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이노 다다타카보다 위대한 인물이 조선에 있음을 부각해,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열등감을 심어 주기 위해 동아일보가 제기한 설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왜곡한다. 일제강점기 교과서 ‘조선어 독본’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김정호와 그의 지도의 진가를 못 알아봤지만, 일본 정부는 김정호의 업적을 알아봐 대동여지도를 통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은 조선 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내용이다. 이렇게 왜곡된 ‘김정호 이야기’는 아직도 한국인의 역사 인식 속에 사실처럼 자리하고 있다.
 

▲ 지난 6월 일본 극우파에게 피해를 입었던 위안부 소녀상

왜곡된 역사 현실에 대한 한국인의 올바른 인식 필요해

지난 4일 일본의 극우조직인 ‘역사적 사실 위원회’가 미국 뉴저지의 유력지 스타레저에 ‘그래, 우리는 사실들을 기억한다’는 제목으로 광고를 냈다. 이 광고에는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였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위안부의 성매매를 금지했다’ 등의 주장이 실렸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왜곡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감추려 하고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조선이 중국의 복속국이었다고 서술하는 등의 허위 내용을 자국의 교과서에 기재하고 있다.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 왜곡을 멈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역사 교육이 점점 경시되는 추세이며 교과서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왜곡된 용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하루속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글_ 김현우 수습기자 hiun917@naver.com
사진_ 문화재청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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