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올해 3월 조경학과에 부임한 새내기 교수 소현수입니다. 봄날의 예쁜 서울시립대학교 캠퍼스에 반해서 입학했던 90학번이기도 하니 오래되고 깊은 인연이지요. 이 지면을 통해 제가 연구하는 조경사(造景史)와 조경 미학을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연 읽기 & 자연 담기 - 조경학의 매력

봄날 캠퍼스를 축제 분위기로 만드는 화사한 벚꽃과 소담스럽게 핀 새하얀 목련꽃, 퍼걸러(그늘시렁) 아래 매달려 은은한 향을 내뿜는 보라빛 등나무 꽃, 뜨거운 여름날 조형관 앞 잘생긴 느티나무가 만든 반가운 그늘,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해방터 계수나무들의 하트 모양 잎사귀, 청명한 햇살에 반짝이며 바닥을 노랗게 수놓은 은행잎, 담쟁이 넝쿨이 창공관 벽을 기어오르며 만든 무늬, 나뭇가지에 매달린 탐스러운 주홍빛 감, 살구, 모과 열매들, 고즈넉한 겨울 분위기에 어울리는 경농관 앞 하얀 수피를 가진 자작나무.

여러분은 이런 풍경들을 보고 잠시 멈춰 선 경험이 있나요? 그런 미감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간혹 매력적인 풍경 앞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러한 캠퍼스의 낭만적 풍경들이 누군가 의도하여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는데, 그것이 ‘조경’입니다. 여러분이 문을 열고 나와서 마주하는 모든 풍경(조경에서 ‘경관’이라고 표현합니다)이 조경의 대상이니까 조경이 다루는 범위가 방대하죠. 자연의 축소판으로서 수목이 만드는 인상적 풍경처럼 조경학의 매력은 자연 읽기, 그리고 자연 담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말랑한 감성으로 자연의 변화와 리듬을 읽고, 성장하는 풍경을 예측하여 빛, 물, 숲, 돌을 디자인하는 능력, 조경인에게 요구되는 과제지요.


조경 역사 속에서 찾는 미학

그렇다면 오래전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방식이 같았을까요? 일찌감치 봄을 알리며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요즘 이루어지는 조경 작업에서 매화나무는 꽃과 향기, 매실을 즐기기 위해서 식재합니다. 반면에 우리 선조들은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시련 극복, 기개, 절조 등 윤리적 관념과 덕성을 함축한 매화나무를 애호하였습니다. 특히 담담한 정신의 경지에 조응하는 달과 눈이 짝이 된 ‘월매(月梅)’와 ‘설매(雪梅)’, 그리고 새벽 매화 ‘효매(曉梅)’를 좋아하였지요. 선조들은 대상의 물리적 성질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일시적 기상 현상과 비가시적 시간까지 풍경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경 역사 속에는 지금 놓치고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조경사는 인류가 외부 공간에 무엇인가 만들기 시작한 이후부터 조경이 성립되고 전개된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선사시대와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유적부터 실질적 조경 작품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르네상스 이후 유산에 집중합니다. 이탈리아의 노단건축식 빌라 데스테 정원, 프랑스의 평면기하학식 정원을 대표하는 베르사유, 풍경화의 장면들로 정원을 구성한 영국의 스투어헤드, 그리고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는 해당 국가와 민족이 누렸던 풍토와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차별화된 조경 양식을 보여줍니다. 패션에 유행이 있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이 공유했던 최고의 아름다움을 정원에 표현한 결과입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다양한 조건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집약시킨 자산들은 검증된 미적 코드를 제공하여 새로운 조경 공간을 만드는데 밑거름이 됩니다. 요즘 재인식되고 있는 국사 교육의 중요성과 같은 맥락이지요.


▲ 전통미를 보여주는 조경공간들
전통의 현대적 재현(再現)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듯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현재를 포함하며 만들어가는 진행형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표현하여 과거의 사실을 반추함으로써 발전적 미래를 준비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였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명소가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공원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 가우디나 2012년 국제적 권위가 있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중국 건축가 왕슈의 작품들은 창작의 근간에 전통과 역사 모티브가 반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조경 작업에서도 과거의 유산을 고스란히 베끼는 대신 현대적 요구와 기능, 재료 등 과거와 달라진 여건을 고려하면서 전통 감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시간적 간극이 있는 기와 담장, 석등, 물레방아, 옹기를 늘어놓은 공간과 아파트 단지 필로티 기둥 사이에 마루를 만든 휴게소처럼 디자이너가 융통성을 발휘한 공간이 전달하는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은 ‘우리 것’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전제돼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디자이너가 내공이 필요한 역사와 전통을 깊이 있게 고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차원적 복사나 섣부른 창의성이 만든 오류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역사가는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오류를 지적하고, 디자이너가 활용하도록 가공된 전통 키워드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신하고 기분 좋은 전통 재현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전통성과 창의성을 대표하는 두 전문가의 협업으로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래된 미래, 전통 조경의 실천

글로벌 시대에서 개성, 지역성, 토속성은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땅에 대한 적응력을 갖춘 전통 문화가 지닌 지속성은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전통 모티브를 다각도로 발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전통’과 ‘생태학(ecology)’이라는 두 가지 패러다임을 결합한 ‘전통 생태학’입니다. 이것은 선조들이 향유했던 삶의 방식을 생태학으로 해석하는 ‘과학으로 전통 바라보기’로 전통 방식의 우수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뒤를 잇는 실천으로 서구 조경의 미학 이론과 미의식을 수용하며 시작된 우리 현대 조경이 나아갈 길을 전통 미학에서 찾고자 합니다. 늘 그랬듯이 전통 공간 답사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현장 체험을 쌓아가면서 미적 규범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리하면 의미 있는 대안이 되겠지요.

보기 좋은 비율로 나눠 거부감을 없앤 높은 기단, 주변에 뒹굴던 돌을 모아 하나하나 짜 맞추어 쌓은 돌담, 자연의 돌과 나무를 접착제 없이 고정시킨 덤벙주초, 계곡물을 인위적 경계 없이 가두어 만든 연못, 바위에 작은 홈을 파서 만든 정겨운 인공 폭포, 거친 바닷바람을 막고 숲 그늘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해안숲, 선조들이 그때그때 삶의 필요에 의해 고안해낸 결과물들입니다. 이런 공간들을 보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훌륭한 조형 의식을 가진 민족임에 틀림없답니다. 여러분도 선조들이 남긴 매력적인 공간을 찾아가서 미감을 공유해보는 것 어때요?

 

글_ 소현수 교수
사진_ 서주훈 기자 joohoon5@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