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이 사실상 현대사회에 큰 역사적 축이었고 현대사를 바꿨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회가 바뀐 역사에 의해 퇴조하고 있다(연세대 총학생회, 2002)”
90년대 말, 운동권 세대의 끝물이라 할 수 있는 당대의 학생회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세상이 더 이상 학생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항쟁을 통해 이룩한 민주주의와 지속된 경제성장은 10년 후 학생운동의 종말을 이미 암시하고 있었다. 이제 학생들은 철학적 성찰이나 거대담론에 대한 토론보다 여가생활의 향유나 취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환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저항의 불씨가 우리대학에는 있었다.


운동권 총학생회의 단말마

1994년 여름, 동트기 직전이었다. 중앙대 안성캠퍼스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대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고함을 지르며 끌려가는 젊은이들 사이에 우리대학의 김종백(국사 90) 前총학생회장도 있었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련) 간부들이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투쟁 방향을 논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후 서총련에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종백 前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서총련 간부 10인이 구속판정을 받았다. 사유는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회장이 사라진 우리대학 총학생회는 비상운영체제로 꾸려나가야 했다. 서총련의 상위 기구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을 비롯한 운동권에서는 정부의 학생운동 탄압을 두고 거세게 반발했다.
이후에도 우리대학 총학생회는 운동권 노선을 유지하며 한총련 등의 외부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하지만 교내에서는 총학생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정치 활동에 집착한 나머지 학내 사안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96년 신촌에서는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졌다. 한총련의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헬기 12대와 병력 6000여 명을 투입해 진압작전을 벌인 것이다. 대학생들은 밤새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불법 폭력시위를 주도한 한총련을 발본색원하겠다”며 한총련 소탕 작전을 펼쳤다. 이 사건은 ‘연세대 한총련 사태’로 불리며 운동권 총학생회의 약화를 야기했다. 여기에 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운동권 총학생회의 입지는 급격히 줄었다. 학생 운동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서울권 대학들에서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줄지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막 내린 한총련 시대

우리대학 총학생회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2000년 진환(경영 96) 총학생회장은 ‘한총련 불탈퇴’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학생회장이 구속되고 임시권한대행 체제가 꾸려지자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는 크게 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대학 총학생회에서 학생운동은 퇴조의 길을 걷는다. 2001년도와 2002년도 총학생회는 한총련의 활동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외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7대 총학생회 선본의 입후보자였던 전태영(법 97)씨는 당시 “학우들의 생활적 요구는 한국사회의 성격과 변혁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한총련의 대의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1년도와 2002년도 총학생회의 선거 유세 내용 중에는 북한과의 자주교류 성사, 방북교류사업의 일환으로 평양인쇄대학과 자매결연 등과 같은 대외 사업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업 모두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2002년도 총학생회의 슬로건 중에는 ‘통일시대의 주인으로’라는 문구가 있지만 핵심 공약은 기숙사 건립, 학교 홍보 등 대내 사업에 집중돼 있었다. 평양인쇄대학과의 자매결연은 공약만 걸었을 뿐 총학생회 임기 중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2003년도 총학생회도 사정은 비슷했다. ‘국·공립대 사립 대학화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외에는 대내 활동이 중심이었다. 진환 총학생회장의 구속 이후 우리대학 총학생회의 탈정치화가 가속된 것이다.

 

비운동권의 강세, 비판도 없고 관심도 없고

암흑기를 지나 비운동권으로

2004년 겨울, 우리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암담했다. 41대 총학생회로 출마한 ‘무한비상’ 선본이 유효투표율 50%를 달성하지 못해 당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2005년 총학생회를 비대위가 이끌게 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에 실시된 보궐선거마저 무산되면서 우리대학은 한 해 전체를 총학생회 없이 보내야 했다. 비대위는 3개 단과대 회장과 그 대리인 등으로 꾸려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2명이 중도에 그만둬 학생자치의 암흑기를 맞았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후 2006년도 총학생회인 ‘행복시대^^’부터는 확실한 비운동권의 길을 걷는다.
 
기억에 남지 않는 총학생회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정치 및 대외적 공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걸핏하면 본관을 점거하며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던 총학생회 역시 자취를 감췄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대학의 등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갔다. 1999년과 2000년 등록금이 동결된 이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8년간이나 연속으로 등록금이 인상된 것이다.

특히 2006년 총학생회인 ‘행복시대^^’는 “등록금 문제는 투쟁보다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당해 평균 등록금 인상률은 9.21%였으며 이는 수년간 들어 가장 높은 수치였다. 2006년도 연말 총학생회 평가에서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없었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이밖에는 딱히 잘한 것도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총학생회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다음 총학생회 선거 투표율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2007년도 총학생회 선거는 투표율 36%에 그쳐 총학생회 출범이 무산됐다. 2007년 첫 번째 재보궐 선거에서도 후보자는 없었고 두 번째 보궐선거가 돼서야 겨우 당선자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총학생회 중흥일까

최근 5~6년간 총학생회의 행보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예전과 같은 운동권의 색채는 사라졌지만 정치인들과의 교류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견 표출, 투표 독려 등의 활동들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총학선거가 단독선본 출마보다는 경선을 통한 선거로 변했다.

2008년도 총학생회 ‘Change up’ 때는 평균 등록금 인상률 9.1%라는 높은 수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총학생회가 계절학기 수업료 조정에 참여해 수업료를 동결시킨바 있다. 또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에 대해 우리대학이 동맹휴업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기도 하면서 대외활동의 물꼬를 터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도 총학생회 선거는 10년만에 2개 선본이 경합하는 경선을 맞았고 2010년도 총학생회 선거는 22년 만에 4개 선본이 경선하게 되는 쾌거를 이룬다. 4개 선본 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2010’ 선본은 대학생들의 정치참여 독려를 위해 지방선거 부재자 투표소 설치를 추진한다. 부재자 투표소 신청자가 기준인원인 2000명을 넘은 대학은 서울소재 대학 중 고려대와 경희대 그리고 우리대학 뿐이었다.

2011년도 ‘동고동락’ 선본 때는 한발 더 나갔다. ‘법인화 반대를 위해 국·공립대 학생회와 네트워크를 구축해 공동대응을 하겠다’, ‘서울 시의원을 불러 간담회를 개최하겠다’ 등의 계획을 세워 대외적 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대련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도 밝혔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2012년도 ‘무한동력’ 총학생회의 경우 반값등록금 도입으로 대내외적 정치적 이목이 우리대학으로 쏠렸다. 무한동력 김경원(환경공학 05) 前총학생회장은 부재자 투표소 설치와 민주당과의 정책간담회를 주도하고 대선 전 통합진보당 이정희 당시 후보를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의 대외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철규 기자 279@uos.ac.kr
서주훈 기자 joohoon5@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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