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절규하는 연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논지로 흐른다. 친미, 친일은 용서돼도 친북은 범죄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이적행위로 묵살 당한다. 혼란한 사회를 바로 잡아 남침을 막고 민주주의 헌법질서를 지키겠다는 군인들이 연달아 대통령이 되었고 독재권력의 콩고물을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졌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었다.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어떤 이는 고문을 받았다.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절대적이다. 한 사람의 인격이 두 사람의 인격보다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경받아야 한다. 죄인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저학력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인간으로서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양심의 자유도, 언론의 자유도 없었다.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자유를 억압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북한에 대항하는 국가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왔다. 민주주의는 그들의 방패였다. 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국민 모두가 치러야 했던 비용은 혹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드는 사회이다. 만들어진 사회 구조에 인간이 편입하는 형태가 아니다. 그래서 다양성이란 것이 항시 존재한다. 각각의 인간이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기 위해 관용이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이다. 건전한 민주주의에서는 그 차이와 다양성이 다양한 토론으로 나타난다. 토론과 타협으로 그 차이가 극복되었을 때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역사는 발전한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우리 안의 차이를 인정했는지 자문했을 때 그 대답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색깔론이나 사상검증을 보라. 혐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혐의는 토론의 대상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민주주의는 동음이의어이다. 하나는 배타적 적대심으로 만들어진 권력체이며 하나는 정상적인 민주주의이다. 전자는 가짜이고 후자는 진짜다. 가짜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체제다. 가짜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버젓이 진짜 행세를 하고 다닌다. 최소한 4, 5공 독재정권에 기생했던 인사들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헌법 질서 운운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구구절절한 변명은 끝도 없다.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변명은 일관성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청산의 역사가 없다. 청산은 우리의 몫이었다. 그들은 심판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무죄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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