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은 꽂았는데 막상 음악을 들으려니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인터넷에 접속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결국에는 ‘인기 차트 100’을 스트리밍한다. 지금의 우리가 음악을 추천 받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영화를 예매할 때도 책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관 사이트가 말해주는 가장 평점이 높은, 혹은 가장 관객수가 많은 영화를 예매한다. 소신 있게 영화를 고른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남의 영화평 한 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책을 살 때도 예전처럼 서점에 가서 직접 고르기보다는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베스트셀러 목록 중 내용이 어려워 보이지 않고 표지가 예쁜 책을 한 권 고른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요즘 그거 인기더라’는 말이 나오면 ‘나도 그거 봤어!’라고 맞장구치기 바쁘다.

지금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취향과 감상평에 너무나도 많이 노출돼 있다. 페이스북에만 들어가도 ‘좋아요’ 버튼이 천 개, 만 개, 십만 개 단위로 올라가는 영상들이 즐비하고 어느 가수의 라이브 영상이라며 올라온 영상에는 대개 ‘레전드’라거나 ‘대단하다’는 짧은 댓글이 달려 있다. ‘OOO님이 좋아합니다’라는 이유로 내 뉴스피드에도 등장한 그 영상은 내가 관심 없고 심지어 싫어하는 취향의 가수라 하더라도 ‘좋아요’ 숫자, 혹은 댓글 숫자만으로 나의 흥미를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앞서가는’ 취향, 따라서 내가 따라하고 싶은 취향은 양적인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존재가 되고 결국 본인의 개성이나 취향조차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결정 장애’를 겪게 된다. 결정 장애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니 생긴 일종의 ‘장애’다. ‘좋아요’ 개수로 나의 취향과 생각이 평가받는 SNS가 만들어낸 신종 정신 질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SNS라는 새로운 ‘체제’를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다수의 의견만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 다수가 새로운 권력이자 폭력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이 체제 안에서 정말 ‘좋은 게 좋은 걸까.’ 다수에 편승해 남의 취향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수의 폭력에 나의 정체성과 취향이 훼손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고민이 없다면 점점 개인의 취향은 흐려지고 모든 ‘개인적’ 선택을 타인의 ‘보편적’ 평가에 기인하게 되는, 좋은 게 마냥 좋을 수 없는 획일주의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장한빛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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