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우 옛집 정원

시청, 동대문운동장, 종로, 청계천.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붐비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비싼 땅값’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떠오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최근 개발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된 곳이라는 점이다. 과거에 급격하게 이루어진 개발과정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운동장이나 빌딩 밑에 묻혀버렸던 유적들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다행히 이 유적들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던 길 아래에 아직 발견되지 못한 유적들이 묻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유적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 바로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다.


 
사라질 위기의 문화유산 구하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산업화라는 험난한 근대사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잊혀졌다. 운 좋게 남아있는 문화유산도 상업화 된 경우가 많다. 문화유산 내에는 기념품 매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마치 한옥에서 기념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기념품을 팔기 위해 한옥이 생긴듯한 느낌이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발전과 무분별한 개발이 이뤄지던 1895년 영국에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시민운동으로 처음 시작됐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문화유산을 확보하고 보존하는 운동이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기부·증여 받거나 시민들의 모금을 통한 기금으로 문화유산을 구매해 수리하고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화유산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시민들 모두의 문화유산이 된다. 문화유산을 공동 소유하게 되면 특정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문화유산을 매매하거나 철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문화유산은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내셔널 트러스트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마을주민들이 돈을 모아 공동우물을 파서 사용하곤 했다. 우물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마을 전체’의 소유로 여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셔널 트러스트가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 이상의 집 내부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몰랐을 곳들

내셔널 트러스트로 보존된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이상의 집’이 있다. 시인 이상이 3세 때부터 23세까지 20년 동안 살았던 집을 내셔널 트러스트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집은 카페와 음식점이 쭉 늘어서 있는 서촌 골목 안에 있다.

작은 간판, 얼핏 보면 카페와 같은 모습에 이상의 집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눈앞에 두고도 한참을 헤매다 들어선 이상의 집에는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 옆에 이상의 작품들이 놓여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차 한 잔과 함께 이상의 작품들을 즐길 수 있다. 이상의 집을 방문한 이성경(56) 씨는 “돈을 내고 남의 가게에 가는 카페와 달리 누구나 올 수 있는 동네의 정자 같은 느낌”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다만 그 정자에는 시민들 뿐 아니라 시인 이상의 숨결도 어딘가에 녹아있다.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는 ‘최순우 옛집’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다. 최순우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 이곳은 주변의 다른 한옥처럼 현대식 빌라나 상가의 형태로 재개발 될 예정이었지만 시민들의 성금으로 매입해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개방할 수 있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대학로가 있는 도심 근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마치 서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최순우 옛집은 들어가기 부담스러운 유적지가 아니라 조용히 휴식을 즐기고 싶을 때 찾게 되는 공간이다.

이상의 집이나 최순우 옛집에서 알 수 있듯이 내셔널 트러스트의 문화유산 중에는 근대문화유산이 대부분이다. 당장 1900년대의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잘 떠오르는 것이 없을 만큼 근대문화유산은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다. 근대문화유산의 경우 대부분 도심에 자리해 있어 재건축과 같은 경제적 이익에 밀려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상의 집이나 최순우 옛집 또한 내셔널 트러스트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카페나 상가로 바뀌었을 것이다. 문화유산을 시민들이 공동 소유하는 내셔널 트러스트는 이런 점에서 문화유산을 영구 보존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다.


 
우리집이니까 고민하지 말고 가볼 것

내셔널 트러스트를 처음 시작해 1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전 국토의 1%를 내셔널 트러스트로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내셔널 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박원식 에듀케이터는 “홍보 부족으로 아직 내셔널 트러스트를 알고 있는 시민들이 많지 않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운영 특성상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대학생들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에서부터 방문자들에게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거나 재능기부를 통해 악기·글·서예와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다. 최순우 옛집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대학생 A(26)씨는 “다른 단순한 봉사와 달리 최순우 옛집에 대한 교육을 받고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더 뜻깊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언제든 갈 수 있다고 느껴지는 문화유산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보존하고 있는 문화유산이 많다. 봄이다. 활짝 핀 벚꽃은 “안 나오면 후회할걸?”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벚꽃도 볼 겸 밖으로 나가 ‘우리 모두가 함께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남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이니,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글·사진_ 윤진호 수습기자 jhyoon200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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