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이름하에 무엇이든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매우 오만한 시각이다. 일명 ‘아이유 사태’를 들여다보면, 이 오만한 시각이 얼마나 윤리와 질서를 깔아뭉갰는지 다분히 드러난다.

아이유는 본인의 수록곡 <zeze>에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주인공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한 아이로 표현한다. 이뿐 아니라 제제에게 나무에 올라 잎사귀에 입을 맞추고,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기를 종용한다. 앨범 커버에 자신을 나무로 표현하고, 곡에 나무에 올라 꽃을 꺾어가라고 쓴 아이유의 의도가 순수하게만 읽힐 수는 없다. 분명한 성적 메타포가 존재하고 이 성적 메타포가 5살 어린아이인 제제에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이유는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논란이 거세지자 여기저기서 아이유를 호위하는 무사들이 등장했다. 신명나게 외쳐대는 구호는 ‘표현의 자유’다. 허지웅은 5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모든 문학은 해석하는 자의 자유와 역량 위에서 시시각각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출판사가 문학의 해석에 있어 엄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주어만 바꾸면 그대로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이야기다. “모든 미디어는 해석하는 자의 자유와 역량 위에서 시시각각 새롭게 발견된다. 전문가가 미디어의 해석에 있어 엄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진중권도 “저자도 아니고 책 팔아먹는 책장사들이 뭔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지”라며 거들었다. 하지만 창작이든 작품의 해석이든 분명히 멈춰야 할 선이 존재하고 그 선을 넘었을 때 져야 할 책임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일명 ‘배우신 분’들이 나서서 아이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대중을 몰아가는 상황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조건적인 자유가 왜 예술의 영역에서만 보장돼야 하는 것일까. 예술은 선택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성역이 아니다. 또한 예술작품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대중들은 당연히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자칭 전문가들이야말로 우매하다.

예술의 탈을 쓰고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는 아이유, 아이유를 지키기 위해 선별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적용하는 전문가들, <zeze>가 굳건히 음원 상위 차트에 머무르도록 도와주는 청자들을 제외한 ‘대중’이 정말로 잘못된 것인가. 오히려 자기 합리화로 똘똘 뭉친 이들이 예술을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만 하다.

박소은 보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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