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은 지난 겨울방학동안 독일 일대를 취재하며 대한민국의 사회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뉴스탐사가 네 번째로 다룰 주제는 바로 ‘난민’이다.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400만에 가까운 시민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2013년 대한민국에 난민 신청을 한 시민들은 총 1574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급격히 증가하며 3배가량인 5711명에 육박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난민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서울시립대신문은 독일로 입국하는 난민들의 동선을 쫓으며 난민 문제에 대처하는 바른 방향을 고민해보았다.  -편집자주-

 

 잘츠부르크, “난민, 너무 많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음악과 낭만의 도시로 유명하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음악과 낭만 대신 독일 국경을 넘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진행 중이다. 잘츠부르크는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난민들에게 잘츠부르크는 독일 국경을 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인 셈이다.

지난해 9월 잘츠부르크 중앙역은 독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난민들로 마비가 됐다. 독일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윽고 전세기차가 운영돼 난민 수백 명을 실었지만 쏟아지는 난민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앙역에서 발이 묶인 난민들로  지하주차장은 난민캠프가 됐다. 독일행 열차를 기다리던 난민 약 1천명은 운행하는 열차가 없어 도보로 독일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독일은 지난해 11월 적극적으로 난민을 수용하던 정책을 철회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독일로 유입되는 난민들의 숫자도 대폭 줄었다.

지난 1월의 잘츠부르크 중앙역은 얼핏 봤을 때 몇 달 전만해도 쏟아지는 난민으로 마비됐었다는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에서는 생생한 증언이 터져 나왔다. 중앙역 지하주차장 안전관리 요원은 “1달 전만 해도 난민들이 이곳 지하주차장에서 묵었다”고 설명했다.

잘츠부르크를 중앙역에서 열차로 약 30분 거리에 독일과 국경을 마주한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한적한 농지와 작은 집 너머 하얀 천막으로 쌓인 캠프를 찾을 수 있었다. 입구는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안 닿은 듯 보였다. 차량들을 검사하던 독일 경찰관에게 정체를 묻자 예전에 사용되던 임시난민캠프라고 설명했다. 도보로 이동을 택했던 난민들이 거쳐 간 것이다.

난민에 대한 두려움은 난민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 단체들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뮌헨으로 향하기 얼마 전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포털 실시간 검색어로 ‘뮌헨 중앙역 테러’가 올라왔다. 이로 인해 뮌헨 중앙역은 폐쇄 상태가 됐다. 뮌헨으로 가는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독일 뮌헨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잘츠부르크 중앙역을 찾았다. 뮌헨 행 열차에서는 경찰관이 여권 검사를 하고 있었다. 공항 입국 이후 한 번도 여권 검사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나라 간 이동이 자유로웠지만 이곳에서는 예외인 듯 했다. 여권 검사를 하던 경찰관에게 이유를 묻자 경찰관은 “어제부터 테러 알람이 두 번 있어, 여권검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뮌헨, “150만? 정말 어려운 문제”

독일에 입국한 대다수 난민들은 가장 먼저 뮌헨 난민캠프로 이동돼 약 6개월간 신원확인 절차를 기다린다. 독일 각지에서 입국한 난민들을 거의 모두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뮌헨 난민캠프는 막연히 주거지와 격리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빚나갔다. 뮌헨 중앙역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면 갈 수 있는 잉골슈타트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은 자동차 아우디의 포럼이 위치해 있어 관광필수 코스로 꼽히기도 한다.

난민캠프는 아우디 포럼과 고작 철창 하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난민캠프를 두르고 있는 담벼락에는 온갖 페인팅으로 가득했다. 내용은 비슷했다. ‘인종차별 반대(no racism).’

난민캠프 앞에서는 일일이 신분증을 검사하며 다소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캠프 정문에는 ‘새해맞이 폭죽을 터뜨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난민들이 폭죽 소리를 총소리로 오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경비원에게 취재요청을 했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경비원 너머로 본 난민 캠프는 캠프보단 마을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

난민캠프에서 횡단보도를 바로 건너면 일반 독일 시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이곳에 살고 있다는 피터는 난민에 대해 “너무 어려운 문제”라며 입을 열었다. 그는 “TV 뉴스에서 난민을 볼 때면 언제나 소녀, 아이들이 나오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난민 대부분은 남성들이다. 항상 취해서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이어 “만약 내가 난민이고, 아이와 아내가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다. 그래서 난민들에게 많은 제도적 지원을 하는 독일의 정책을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며 “다만 점점 난민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어 보인다” 라며 설명했다.

베를린, 그래도 함께 살아가며

베를린에서는 계속 유입되는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난민캠프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베를린의 템펠호프 국제공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어졌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산책을 하는 한적한 공터일 뿐이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 이 공항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11월 이후부터 공항의 비행기 격납고에 임시난민캠프가 들어선 것이다. 기존 시설로는 난민을 수용하기 역부족이었던 독일 정부는 이곳 템펠호프 공항에도 임시난민캠프를 마련했다. 경비는 삼엄했다. 비행기 격납고 건물은 높은 회색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를 통제하는 보안 요원들이 엄격하게 난민들의 출입을 검사하고 있었다. 예민한 분위기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철창 너머로 하얀 텐트가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난민들은 이 텐트와 건물의 1층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 한참을 돌아가자 난민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의료진을 볼 수 있었었다. 간간이 음식을 배달하는 트럭도 보였다. 하지만 이들 외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같은 건물의 2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립대학교로 이용되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했던 1층과 달리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교실에서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던 학생들의 모습은 어느 대학과 다를 바 없이 활기찼다. 한 층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과연 학생들은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난민들을 만나본 적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대학교에서 만난 한 학생은 “매주 아래층의 난민들을 대상으로 독일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 외에 난민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상황을 전했다.

템펠호프 공항과 마찬가지로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만든 난민캠프가 베를린에 또 있다. 옛 동독의 비밀경찰본부였던 슈타지에는 아파트 같이 생긴 여러 건물들이 함께 위치해 있었다. 자욱한 안개에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든 날씨였다. 때문에 슈타지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그런데 한 건물에서 환한 불빛을 내뿜었다. 다가가자 한 눈에 급식실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급식실로 들어서는 난민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급식실로 달려가려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가던 부부도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목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글 · 사진_ 김태현 기자 taeheon119@uos.ac.kr
글_ 류송희 기자 dtp02143@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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