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지금…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되는 요즘이다. 지난 31일, 서울시립대신문은 독도아카데미와 함께 독도에 다녀왔다. 쉽게 닿기 힘든 독도의 모습을 담은 탐방기와 함께, 한국과 일본이 지금까지의 소모전을 그만두고 건강한 외교관계를 만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자세에 대해서 논의해봤다. -편집자주-

 
신문사 회의가 끝나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갔다. 밤 11시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버스 한 대가 있었고 집합시간보다 일찍 와 있던 기자들은 버스에 착석한 채로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독도였다. 기자들의 몸을 싣고 버스는 후포로 향했다. 후포항의 하늘은 칙칙했고, 비가 조금씩 내렸다. 우리는 울릉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두 시간여의 거친 뱃길에 배안의 사람들은 사경을 헤맸다. 멀미의 여파였다. 울릉도에서 휴식시간을 가진 후 독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울릉도로 향하던 길보단 덜했지만 여전히 파도는 거셌고 독도에 배를 정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실제로 배를 타고 독도로 들어갈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사흘이 되지 않는다. 접안을 실패하게 되는 날은 멀리서 독도주변을 선회하고 울릉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멀리서 독도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내릴 수는 있을지 걱정됐다. 접안을 무사히 마친 배에서는 멀미 환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독도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단 20분. 사람들은 험난한 뱃길로 뒤집어진 속을 부여잡고 부랴부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독도의 경관을 찍는 사람도 보였고 독도경비대와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여느 관광지에서의 기념사진과 다를바 없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로 나뉘며 이날 관광객이 볼 수 있는 곳은 동도뿐이었다. 서도는 그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없어 동도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눈으로 직접 본 독도는 미디어 속의 독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면 속에 있던 돌섬과 갈매기가 그렇게 새롭지만은 않았다. 다만 독도경비대가 총을 든 채 근무하는 모습은 보니 독도의 국제적 위치를 새삼 실감하게 됐다. 동도를 올라가는 경사로는 독도경비대에 의해 통제되고 있어 동도 역시 제한적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 나현홍(35) 씨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알고 있어야 할 국토인데 어떤 곳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울릉도 여행을 오게 되면서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독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했다.

 
20분간의 짧은 탐방 끝에 아쉬움을 남겨두고 울릉도로 돌아온 후 독도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쌓여온 사료들이 보관돼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부터 일본이 독도를 영유하지 않았던 과거의 기록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들이 지금의 영유권 분쟁에 어떤 근거로 작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예컨대, 삼국시대 때부터 신라에 편입됐다는 사실만을 통해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울릉도와 독도에는 일본인의 거주도 작지 않았다. 일본 역시 과거 독도에서의 어업권 등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다. 과연 이런 주장들은 설득력 있는 것일까?

한국과 일본은 사료를 근거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박재정 교수는 “전통국가와 근대국가의 영토 인식에 차이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통시대적으로 논쟁을 하고 있는 게 올바른 일인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대의 국토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국토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의 영유권 분쟁에 있어 근거로 활용하기 어렵다. 박 교수는 “전통적 국가는 근대적 국가처럼 정확한 국경과 국경 내의 균질한 통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료에 나온 독도에 대한 인식만으로 지금의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 교수는 “독도문제에 관해서 한국은 역사적 맥락을 통해 얘기해야 한다. 사료 싸움은 서로에게 유리한 자료만 취하게 되는 문제와 사료 자체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영유권 분쟁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한 것일까? 지금의 영유권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C 후반부터이다. 이 당시 조선은 개항을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부산, 원산, 인천, 강화도의 개항과 함께 일본인의 이주가 늘었다. 동해를 둘러싼 일본인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울릉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됐다. 이후 조선은 섬에 대한 통치력을 높이고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됐고 섬으로의 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울릉도에는 조선사람과 일본사람 모두가 살게 됐다.

헌데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과 배경은 배제한 채 영유권을 주장한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여 영유 의사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국제법에 의거해 무인도를 점령했기 때문에 영토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국제법의 논리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1899년 조약개정을 실현하게 되면서 일본도 국제법상으로 유럽, 미국과 동등한 입장이 됐다. 국제법상 동등한 위치가 되고 나서야 일본은 창간한 국제법 잡지에서 ‘드디어 국제법이 진정한 국제법이 됐다’고 얘기했다. 반면 그 당시 한국은 국제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소국이었다. 박 교수는 “당시의 국제법은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법은 아니었다. 두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그런 상황에서 국제법이 얼마나 공평하게 진행될수 있겠는가. 국제법 자체도 역사적 맥락속에서 봐야한다”고 말했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사료만으로 주장하는 것은 과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굳어질 우려가 있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과의 소모적인 외교관계를 만들뿐이다. 서로의 주장과 근거에 대한 배경의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사진_ 이재윤 기자 ebuuni32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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