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 간, 서울시립대신문은 베트남 호찌민시를 방문해 특별취재를 진행했다. 사이공이라는 옛 이름으로도 알려진 호찌민시는 베트남 최대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도시에 공산주의 혁명가의 이름이 붙은 셈이다. 경제 파트너로서의 한-베 관계,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한 내용과 호찌민시 여행기를 기사로 담았다. -편집자주- 

지난해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두 국가의 사이 또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는 베트남 최고 수준의 대외협력관계다. 지난 2021년 베트남의 총외국인 투자액 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3%로 가장 높았다. 한국 경제에서 베트남이 가지는 위상도 커져 지난해 한국의 대베트남 교역 흑자는 약 43조원으로 교역국 중 가장 큰 규모다. 불과 반세기 전 서로 총구를 겨눴던 한국과 베트남은 어떻게 최고의 교역 파트너가 됐을까. 

위기 속 발 빨랐던 한국

1975년 20년간의 전쟁이 북베트남에 의한 적화통일로 끝나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플레이션과 지지부진한 경제 성장에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과 같은 개혁정책인 ‘도이머이’를 실시했다. 베트남 시장 개방 이후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대우그룹으로, 1990년 호찌민시 1991년 하노이시에 지사를 개설하고 호텔과 아파트 등을 건설했다. 이후 1992년 베트남과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양국 간의 경제적 교류가 시작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전략실 곽성일 실장은 “풍부하고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이 당시 베트남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며 “시장의 확대 가능성은 큰 반면 다른 나라의 자본 진출이 비교적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도 베트남의 매력이었다”고 말했다. 26년 전 베트남으로 이주해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오창섭(전자공학 88) 씨는 “제조업 기반의 중소기업 위주로 조금씩 베트남에 진출했었다”며 “대우그룹의 진출과 수교 이후 금호아시아나, 효성, 삼성과 같은 대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시기 양국 간 주요 교역 품목은 석탄·석유제품이나 직물·의류 등 경공업과 중화학 품목 위주였다.

2007년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장경제체제 도입과 국제사회로의 편입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대부분의 나라가 베트남 시장에서 철수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과의 교역에서 우세를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한발 빠른 의사결정이었다고 평가된다. 곽 실장은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모두가 발을 뺀 상황에 우리나라가 먼저 치고 나가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한·베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2015년부터 현재까지도 교역 규모는 계속해서 성장 중이다.

이념의 틀 버리고 상생해야

최근 한국 대기업들은 베트남과의 상생을 위해 노력 중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기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생산 전문가 사업을 전개했다. 한국 대기업들이 베트남을 중간재 생산 기지로만 사용한다는 현지의 비판에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곽 실장은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은 외국기업이라 시장 관리에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다”며 “베트남 정부도 ESG 경영을 강조해 한국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위해 선제적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은 과감한 투자와 현지화 노력으로 사업 확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치체제는 여전한 위험요소다. 

특히 땅 소유권과 사업권 관련해 정부의 허가가 필수적이어서 국내 기업은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호찌민에서 부동산 업계에 종사하는 전성배(세무 05) 씨는 “롯데그룹 회장이 방문까지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지만, 허가문제로 사업을 못 하고 있다”며 “롯데몰 역시 허가를 받았지만 정부의 입김에 설계를 변경해 40층에서 30층으로 규모가 줄었다”고 전했다. 다만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교역에 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곽 실장은 “성장의 수단으로 개방을 택한 베트남은 인구 1억으로 시장이 크지 않아 해외 자본이 빠져나가는 대외정책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이념의 틀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대학과 베트남 간 교류 필요해

과거 베트남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라고 불렸다. 많은 한국인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시작하거나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정착해 새로운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성배 씨는 “초창기에 베트남에 온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인건비도, 토지 임대 비용도 올라 굉장한 아이템이 아니면 대기업이 아닌 이상 살아남기 쉽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베트남에 진출하고 싶은 청년들에게는 현지 채용보다는 주재원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오창섭 씨는 “현지 채용은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라 임금이 적다”며 “기업에 입사해서 주재원으로 온다면 지금 상상하는 그대로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재원이 아닌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베트남에 온다면 한국에서 생각하던 생활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베트남은 물가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한국에서의 생활 수준과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하면 오히려 씀씀이가 더 커져 결국 몇 년 만에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전 씨는 “요즘은 베트남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한국 사람들이 많다”며 “그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호찌민시에 있는 우리대학 동문회와 우리대학이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 씨는 “호찌민시로 온 교환학생들과 몇 번의 만남을 가졌으나 연속성이 없어서 아쉬웠다”며 “한 명이라도 좋으니 공장 견학도 시켜주면서 실질적으로 베트남 진출에 대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아름다운 융합의 도시, 호찌민시


1일 차   프랑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호찌민시
 

호찌민시에 방문해 처음으로 맛본 베트남 정통 쌀국수
호찌민시에 방문해 처음으로 맛본 베트남 정통 쌀국수

부푼 마음을 안고 6시간의 긴 비행 끝에 떤선녓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30분가량의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나가자 어느덧 정오가 돼 있었다. 베트남에 도착한 만큼 첫 끼니는 만장일치로 쌀국수(Phở)로 정했다. 공항을 나가 도로로 나가니 빽빽한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매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인 식당에 도착했다. 한참을 검색해서 가장 기본적인 소고기 쌀국수 주문에 성공했다. 음식이 나와 국물을 한 입 먹자 진하고 담백한 소고기 육수에 감동했고, 4만동으로 원화로 약 2천원이라는 가격에 놀랐다. 베트남에 왔다는 사실을 미각으로 느낀 순간이다. 유명세와 달리 쌀국수를 뜻하는 베트남의 대표음식 Phở는 역사가 짧다. 19세기 항구 노동자들이 먹던 국수가 프랑스 소고기 수프와 결합해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오토바이로 꽉 찬 횡단보도를 수차례 뚫어 다음 목적지인 노트르담 성당과 중앙우체국에 도착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떠 지어졌다. 성당 앞 성모 마리아 동상에서 본 성당은 보수 공사 중이라 온전한 외관은 아니었지만, 붉은 벽돌에서 뿜어나오는 아름다움은 막을 수 없었다. 길 건너 상아색과 초록색으로 장식된 중앙우체국 역시 프랑스 식민지 시기 지어져 현재도 우체국으로 사용 중이다. 아쉽게 입장이 마감돼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중앙 정면에 걸린 호찌민의 초상화가 그의 위상을 확인시켰다. 이날의 마지막 방문지는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 전망대인 스카이덱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융합의 도시’ 호찌민시의 첫째 날을 마무리했다.

2일 차   ‘격동의 근현대사’를 가진 호찌민시

호찌민시와 베트남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알아야 한다. 이날 첫 번째로 방문한 호찌민 전쟁박물관은 베트남의 근현대사와 베트남 전쟁 과정을 상세하게 전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를 관람하니 19세기 외세의 침략, 해방 후 혼란한 국내 정치, 그리고 이념의 대립과 동족상잔의 비극 심지어 독재와 쿠데타까지 베트남과 한국은 많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곳은 1995년 베트남이 미국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미국 전쟁 범죄 박물관’이라고 불렸던 만큼 미국에 적대적인 시각으로 전시가 구성됐다. 특히 게릴라군인 베트콩의 근거지인 정글을 없애기 위한 미군의 고엽제 살포 작전인 ‘에이전트 오렌지’에 의한 피해가 상세하게 묘사됐다.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기형아의 사진에 많은 전시 공간을 할애했는데 사람에 따라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였다. 의외의 모습은 많은 수의 미국인 관광객이 엄숙하고 진중하게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픈 과거를 직시하며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프랑스풍 건축양식이 남아있는 호찌민시 우체국
프랑스풍 건축양식이 남아있는 호찌민시 우체국

전시의 여운을 안고 이동한 곳은 전쟁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통일궁으로 1868년 프랑스 총독의 영사관으로 지어졌다. 1954년 프랑스가 철수하자 다음해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곳은 미군 작전사령부로 사용됐다. 1975년 북베트남 탱크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자 ‘통일궁’으로 개칭됐다. 이때 사이공이란 이름도 북베트남 혁명가이자 초대 주석인 호찌민의 이름을 따 호찌민시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모습과는 반대로 베트남의 굴곡진 현대사를 상징하는 통일궁이었다. 우리와 닮은, 그래서 더 아팠던 베트남의 근현대사와 함께한 호찌민시에서의 두 번째 날이었다.

3일 차   ‘밤의 도시’ 호찌민시
 

낮보다 밤에 빛나는 부에비엔 워킹 스트리트
낮보다 밤에 빛나는 부에비엔 워킹 스트리트

어느새 다가온 마지막 날. 여행자 거리라 불리는 부에비엔 거리 한 가운데에 있는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겼다. 상상과 달리 한산했던 거리에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운 날씨를 생각해보면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가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콩 카페’에 들어갔다. 콩 카페는 호찌민 정권 시절을 테마로 한 베트남의 커피 체인점이다. 현지에서 생산된 로부스타 원두의 사용과 특색 있는 인테리어로 베트남을 대표하는 커피 브랜드가 됐다. 대표 메뉴인 코코넛 스무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금세 더위가 가셨다.
 

한때 프랑스 식민지배 기관이었던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한때 프랑스 식민지배 기관이었던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어느새 지는 해에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한층 시원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를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호찌민 시청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첫째 날 봤던 노트르담 성당이나 중앙우체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조명 아래 넓은 광장에는 가족들이 다 같이 밤 산책을 나온 건지 아이들이 매우 많았다. 선선한 밤공기를 맡으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겨웠다. 발걸음을 돌려 낮에 짐을 맡겨 둔 여행자 거리에 돌아갔다. 도로에 크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춤추는 사람들,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던 밴드, 그리고 정말 여행자 거리라는 이름답게 수많은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누군가 ‘호찌민시는 밤이 진짜’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 말처럼 호찌민의 밤은 낮과는 다른 활기찬 매력이 있었다.
 

각양각색 상품들이 즐비한 벤탄시장
각양각색 상품들이 즐비한 벤탄시장

더운 날씨와 번역도 어려운 베트남어,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 걱정됐던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3일은 생각보다 짧았지만, 호찌민시의 매력에 빠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러분이 햇살과 느긋함,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고 싶다면 호찌민시으로 떠나보길 바란다.


최윤상 기자 uoschoi@uos.ac.kr
이주현 객원기자 xuhyxxn@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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